차가운 바람이 뼈를 에는 듯 스쳤다. 강진은 어둠 속에 잠긴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먹혀든 듯 고요했지만, 그의 귓가에는 끊임없이 핏빛 비명과 배신의 속삭임이 울렸다. 손에 들린 검은 달빛조차 삼킬 듯한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끝에서 번득이는 푸른 불꽃은 강진의 심장처럼 차갑게 타올랐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물든 회한과 복수의 열망으로 번득였다.
“유하….”
나직이 읊조린 이름이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이름 속에는 한때 세상의 전부였던 유대와, 이제는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이 된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
그때 우리는 어렸다. 스승님의 그림자 아래에서 함께 마법을 배우고,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며 검술을 익혔다. 나는 강인했지만 다소 투박했고, 유하는 영리했지만 섬세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완벽한 동반자였다.
“진아, 우리 함께라면 세상의 끝까지 갈 수 있을 거야!”
활짝 웃던 유하의 목소리는 한때 강진의 가장 큰 위안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던 나의 모습은 강하고, 올바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빛나는 존재였다. 나는 그를 믿었다. 그 맹세가 비수가 되어 등 뒤를 찢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심연의 눈물’을 봉인하려던 의식은 피로 물들었다. 고대 마법의 힘이 폭주하려던 순간, 스승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힘을 제어하려 했고, 나는 그 옆에서 결계를 유지했다. 유하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였다. 그는 스승님과 나의 뒤편에서 마력의 흐름을 조율하며 의식이 성공하도록 도왔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결계가 거의 완성될 무렵,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한기에 돌아보았다. 유하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은밀히 숨겨져 있던 마법 단검이 들려 있었다. 칼끝은 검은 빛을 뿜으며 강진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유하… 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검은 심장을 꿰뚫었다. 세상의 모든 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격렬한 고통 속에서 나는 무너져 내렸다. 그때 보았다. 유하의 얼굴에 번지던 섬뜩한 미소와, 그의 손에 들린 채 강진의 피를 빨아들이던 검은 돌멩이, 바로 ‘심연의 눈물’을.
“미안해, 진아. 하지만… 네 힘은 나에게 더 잘 어울려.”
그는 내 몸에서 솟구쳐 나오는 마력을 ‘심연의 눈물’로 흡수하고 있었다. 나의 생명력과 함께 모든 마법적 재능, 심지어 스승님의 보호막까지도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스승님은 힘없이 쓰러졌고, 폭주하는 마법에 삼켜졌다. 유하는 나의 힘으로 강화된 ‘심연의 눈물’을 쥐고 비틀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힘은 내 것이다. 너는 여기서 죽고, 세상은 내가 스승님과 너를 지키려다 실패한 영웅으로 기억할 것이다. 영원히.”
그는 나를 쓰러진 스승님의 시신 옆에 내던졌다. 거대한 균열이 지면을 가르고, 나는 그 끝없는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빛나는 ‘심연의 눈물’을 든 유하의 그림자였다.
***
나는 죽지 않았다. 심연의 문턱에서, 나는 증오를 먹고 살아남았다. 육신은 찢기고, 정신은 산산조각 났지만, 복수라는 단 하나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심연의 끝없는 어둠은 나를 집어삼키는 대신,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빚어냈다. 나의 피부는 그림자의 굳은살로 뒤덮였고, 나의 눈동자는 더 깊은 어둠을 품게 되었다. 내 안에서 들끓는 복수의 맹세는 심연의 마력과 융합하여 새로운 힘을 부여했다.
나는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힘을 길렀다. 금지된 주술, 잊혀진 검술, 그리고 심연의 그림자를 조종하는 법을 익혔다. 그림자들은 나의 손발이 되어주었고, 어둠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나는 강해졌다. 나의 모든 세포는 유하를 향한 증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바깥세상은 나를 잊었지만, 나는 유하를 잊지 않았다. 유하는 이제 ‘여명의 군주’라 불리며 번영하는 왕국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잃은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심지어 스승님의 유산까지 가로채어 자신을 위대한 영웅으로 포장했다. 그의 성채는 빛나는 마법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강진에게는 그저 거대한 무덤일 뿐이었다.
오늘 밤, 그 무덤을 부술 것이다.
강진은 유하의 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지막 그림자 병사들을 처리했다. 그의 검은 피를 갈망하며 울부짖는 듯했다. 병사들은 그림자 속에서 솟아나는 강진의 모습에 혼비백산했지만, 그들의 공포는 강진의 만족감을 더해줄 뿐이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빠르게 성벽을 넘어, 가장 깊은 곳, 유하의 왕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철컥.
육중한 왕좌의 홀 문이 열렸다. 홀 안은 수많은 마법 촛불로 밝혀져 있었고, 그 끝에는 빛나는 갑옷을 입은 유하가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뒤에는 ‘심연의 눈물’이 뿜어내는 검은 마력이 거대한 오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유하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생명력과 ‘심연의 눈물’이 그를 영원한 젊음 속에 가두어 놓은 것이다.
“강진… 네가 살아있을 줄이야.”
유하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냉소가 섞여 있었다. 그는 여전히 오만했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심연은 모든 것을 삼키는 곳인데. 하긴, 너라면 그 증오만으로도 살아남을 수도 있겠군.”
유하는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죽어 마땅한 네가 감히 이곳까지 기어들어왔군. 하지만 소용없다. 나는 이제 과거의 내가 아니야. ‘심연의 눈물’의 힘은 완벽하게 내 것이다.”
강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유하를 향해 불타올랐다. 그는 검은 그림자 속에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래, 네가 변한 만큼 나도 변했지. 아니, 나는 네가 만든 괴물이 되었다.”
강진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폭풍 같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네가 빼앗은 모든 것을 돌려받으러 왔다. 너의 목숨으로.”
유하는 크게 비웃었다.
“어리석군. 네가 감히 나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너는 한낱 그림자 속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그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심연의 눈물’이 유하의 등 뒤에서 빛나며 홀을 진동시켰다.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강진을 향해 쇄도했다.
강진은 손쉽게 마력 파동을 피했다. 그의 몸은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는 검은 검을 들어 올렸다.
“네가 빼앗은 나의 힘으로 나를 이길 생각인가? 어리석은 건 너다.”
강진의 검에서 검은 불꽃이 솟구쳤다. 그는 그림자처럼 빠르게 유하에게 달려들었다.
클링! 쾅!
칼날과 마법이 부딪치는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유하는 ‘심연의 눈물’의 힘으로 막강한 마법을 쏟아냈고, 강진은 그림자 마법과 뼈를 깎는 듯한 검술로 맞섰다. 유하의 마법은 강력했지만, 강진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고, 그의 검은 어둠 자체였다. 유하의 화려한 공격은 강진의 그림자에게 흡수되거나, 간발의 차이로 빗나갔다.
“네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힘은… 네가 익히던 마법이 아니잖아!” 유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 덕분이지. 심연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 네가 나를 그곳에 던져 넣었으니, 마땅히 네가 그 대가를 치러야지.”
강진은 유하의 마법 방어막을 뚫고 들어가, 그의 팔을 검으로 베어버렸다. 유하의 비명이 홀에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감히 이 몸을…!”
유하는 분노에 눈이 멀어 더 강력한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한쪽 팔을 잃었고, 강진의 그림자들은 그의 시야를 가렸다. 강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유하의 등 뒤에 나타나, ‘심연의 눈물’이 박혀 있던 심장을 다시 한번 꿰뚫었다. 이번에는 단검이 아닌, 어둠을 머금은 검이었다.
“이건… 네가 나에게 선물한 고통이다.”
강진은 검을 비틀었다. 유하의 몸에서 ‘심연의 눈물’이 빠져나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검은 돌멩이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 빛을 잃었다. 강진은 그것을 자신의 손에 쥐었다. ‘심연의 눈물’은 강진의 피를 다시 한번 흡수하며, 그의 손바닥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통이 아닌, 차갑고 익숙한 힘이 느껴졌다.
유하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빠르게 꺼져갔다. 그는 몸을 비틀며 강진을 바라보았다.
“진아… 네가… 괴물이 됐어….”
“그래. 네가 만든 괴물이다.”
강진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유하의 시신이 왕좌 아래로 쓰러졌다. 그의 얼굴에는 마지막까지 배신자의 후회 대신, 자신이 만든 괴물에 대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왕좌의 홀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강진은 ‘심연의 눈물’을 든 채 홀 한가운데 서 있었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그의 손에 유하의 피가 묻어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차가웠다. 승리감보다는 깊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복수가 끝난 지금, 그의 앞에는 끝없는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강진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의 안에서 ‘심연의 눈물’이 차갑게 빛났다. 괴물이 된 그는 이제 홀로 남았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그는 새로운 목적을 찾아야 했다. 아니면… 영원히 그림자 속을 떠돌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의 발밑으로 유하의 피가 스며들어 메마른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복수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혹은, 영원한 고통의 시작이었다. 강진은 아무도 없는 홀에서 검은 그림자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