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또다시 같은 꿈에서 깨어났다. 창밖은 아직 새벽의 푸른 기운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한낮의 뜨거운 열기 속에 던져진 듯 혼미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심장은 방금까지 꿈속에서 뛰었던 격렬한 리듬을 기억하며 요동쳤다.
침대 옆 사진 속 언니, 현아는 십대 특유의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햇살 아래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유진이 기억하는 언니의 마지막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유진이 꿈에서 만나는 현아는 스무 살의 어엿한 아가씨였다.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유진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장난스럽게 웃는 현아는, 유진이 잃어버린 동생이 아니라, 유진이 꿈꿔왔던 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처음 ‘꿈을 파는 상점’에서 그 꿈을 샀을 때, 유진은 언니의 상실감에 고통받고 있었다. 몽상가는 “가장 그리워하는 이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선사해드리겠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행복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꿈속의 현아는 살아 있었고, 웃고 있었고, 유진과 함께 평범하고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브런치를 먹고, 영화를 보고, 철없는 농담을 나누며 깔깔거렸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지극히 현실 같은 꿈이었다.
문제는 그 꿈이 너무도 완벽했다는 것이다. 매일 밤, 유진은 현아가 살아있는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유진은 행복했다. 꿈속의 현아는 유진이 힘들어할 때마다 따뜻한 조언을 해주었고, 유진이 느끼는 외로움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잔혹한 현실이 유진을 덮쳤다. 이 세상에 현아는 없다는 사실. 그 간극이 유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현실의 유진은 점점 더 메말라갔고, 꿈속의 유진만이 생기 넘쳤다.
어느 날부터인가, 꿈속의 현아가 현실 속 현아의 기억을 덮어버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현아가 어떤 표정으로 잔소리를 했는지, 어떤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을 채우는 건 오직 꿈속 현아의 얼굴과 목소리뿐이었다. 현실의 현아는 점점 희미해지고, 꿈속의 현아가 진짜 현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공포에 질렸다. 언니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릴까 봐, 영원히 꿈의 굴레에 갇힐까 봐 두려웠다.
유진은 결국 다시 ‘꿈을 파는 상점’을 찾았다. 낡은 간판이 달린, 언제나 고요하고 신비로운 그 상점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문을 열자, 낮은 종소리가 맑게 울리고 오래된 책과 아득한 달빛이 섞인 듯한 묘한 향기가 유진을 감쌌다. 상점 안은 변함없이 꿈의 조각들로 가득했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 갇힌 무지개 색깔의 웃음소리, 은하수가 흐르는 듯한 슬픔의 눈물, 푸른 안개처럼 피어나는 희망의 속삭임들. 모든 것이 덧없이 아름다웠다.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에 눈빛만이 형형한 몽상가가 상점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가 유진을 바라보자,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고뇌를 모두 꿰뚫어 본 듯한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다시 오셨군요, 소녀여. 어떤 꿈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습니까?” 몽상가의 목소리는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아는 듯한 깊이가 담겨 있었다.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샀던 꿈… 현아 언니의 꿈이 너무 현실 같아요. 아니, 현실보다 더 진짜 같아요. 이제는 꿈속의 언니가 진짜 언니 같고… 현실의 언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희미해져요. 두려워요. 제 기억이… 변하고 있어요.”
몽상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꿈은 씨앗과 같습니다. 처음엔 작고 미약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심어지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납니다. 특히나, 당신이 간절히 바랐던 꿈일수록 더욱 강하게 자라나죠. 당신은 현아를 잃은 슬픔을 위로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현아와 함께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 두 가지 마음이 꿈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유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대로 계속 꿈속에 갇히게 될까요?”
몽상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병 안에는 잿빛 안개가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꿈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소녀여. 현아와의 꿈을 영원히 붙잡고, 당신의 현실을 꿈속의 그림자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 꿈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건넨 유리병을 유진은 조심스럽게 받았다. 잿빛 안개 속에서 아련한 슬픔과, 동시에 희미한 위로의 감정이 느껴졌다.
“이것은 ‘현실의 눈물’로 빚어진 꿈입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온전히 마주하고, 그 아픔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꿈이죠. 고통을 회피하는 대신, 고통을 끌어안고 극복하는 법을 알려줄 겁니다. 하지만… 이 꿈은 현아와의 완벽한 재회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꿈속에서 현아를 만난다 해도, 그녀는 당신이 기억하는 진짜 현아가 되어 당신에게 이별을 고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슬픔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유진은 유리병을 든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현아와의 찬란한 꿈을 놓아야 한다니. 다시 한번 언니의 부재를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언니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컸다. 꿈속 현아의 환영에 갇혀, 현실의 삶마저 무의미해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소녀여. 꿈속에서 영원히 행복한 거짓을 살 것인지, 아니면 아프더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진정한 치유의 길을 걸을 것인지.” 몽상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무게는 유진의 어깨를 짓눌렀다.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잿빛 안개가 담긴 유리병을 꽉 쥐었다. 뜨거운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언니의 진짜 웃음소리를 기억하고 싶었다. 언니의 진짜 향기를. 설령 그것이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할지라도. 꿈속의 허울뿐인 언니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슬픔과 사랑을 담아 기억할 수 있는 진짜 언니를 다시 찾아야 했다.
“선택하겠어요.” 유진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은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현실의 눈물이 담긴 꿈을 주세요.”
몽상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소녀여. 당신의 밤은 이제 더 이상 달콤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진정한 새벽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유진은 몽상가에게서 새로운 꿈을 받아들였다. 잿빛 안개가 담긴 작은 병은 그녀의 손안에서 차갑게 빛났다. 상점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동시에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유진은 밤하늘의 별들이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녀는, 언니를 기억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했다. 꿈속의 환상이 아닌, 현실의 아픔과 함께 언니를 보내는 진정한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 또한 새로운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진은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