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는 숨을 들이켰다. 곰팡이와 눅눅한 종이, 그리고 정체 모를 금속의 퀴퀴한 냄새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국립 고문헌 보관소의 지하 3층, 통제된 구역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잊힌 곳. ‘정리’라는 명목하에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던 잡동사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퇴근 시간은 이미 한참을 넘겼지만, 이 끔찍한 작업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젠장, 대체 여기다 뭘 처박아 둔 거야.”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손전등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거대한 철제 선반들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진 통로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환풍기 소리만이 이곳이 살아있는 공간임을 겨우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지후는 한참을 씨름하다가 마침내 거대한 나무 궤짝 하나를 선반 틈새에서 끌어냈다.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궤짝은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뚜껑을 고정한 쇠고리는 녹슬어 있었다. 고작 스무 살의 조교 신분으로 이런 막일을 맡았다는 사실에 다시금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 안에 보물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투덜거리며 쇠지렛대로 궤짝의 뚜껑을 비틀었다. 삐걱이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정적을 찢었다. 마침내 뚜껑이 열리고, 안에서는 또 다른 먼지가 푹 하고 솟아올랐다. 지후는 팔을 휘저어 먼지를 쫓아내고 손전등을 궤짝 안으로 비췄다.
낡은 천 조각, 빛바랜 지도 몇 장,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들. 실망스러운 내용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내 궤짝 한쪽 구석에 놓인, 다른 물건들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에 꽂혔다.
그것은 작은 책이었다. 아니, 책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기이한 형태였다. 가로세로 대략 한 뼘 정도 크기에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표지는 검고 칙칙한 색이었으나,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빛깔을 띠는 듯했다. 마치 오랜 시간 굳어진 핏덩이 같기도, 혹은 검게 응고된 진흙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재질이었다. 가죽 같기도 하고, 단단한 나무 같기도 했지만, 둘 다 아니었다.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표면에 닿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희미한 떨림이 시작됐다. 뇌리를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금속성 진동.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려 했으나, 떨림은 점차 강해지며 그의 손 전체를 감쌌다. 마치 수만 개의 미세한 벌레들이 살갗 아래에서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표면에는 정교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어떤 알파벳도, 어떤 그림의 형태도 아니었다. 단지 구불구불 이어지고 끊어지는 선들이었을 뿐인데, 보는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듯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지후는 숨을 멈췄다. 주변의 곰팡이 냄새조차 사라진 듯했다. 오직 그의 심장 박동만이 귀청을 때렸다. 그는 책을 궤짝에서 꺼내 들었다.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그의 손에 닿은 순간, 마치 그 가벼움이 온 우주의 무게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귓가에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특정 언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음산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저 멀리 심해에서 들려오는 고래의 울음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듯한 기묘한 위압감을 동반하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앞의 책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검은 표면 위에서 보랏빛과 녹색이 뒤섞인 불길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 빛은 희미했지만, 지후의 눈을 사정없이 찔렀다. 그의 시야가 일렁였다.
벽이 휘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벽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했다. 멀쩡하게 직각을 이루고 있던 선반의 모서리가 뭉개지고, 평평하던 바닥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빛바랜 천장 조명은 더욱 격렬하게 깜빡이다가 마침내 파직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꺼졌다.
완전한 암흑. 손전등은 이미 그의 손에서 떨어져 어딘가로 굴러갔는지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광채만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시각적 정보가 되었다. 그 불길한 빛은 공간을 비추는 대신, 오히려 공간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속삭임은 이제 단순한 음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의식 속에 직접 파고들어왔다.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말을 걸고 있었다. 잊힌 시간의 연대기, 존재하지 않는 색채의 향연,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지후의 정신을 난폭하게 할퀴었다.
“안 돼… 멈춰…!”
그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책을 든 손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 순간, 책의 한 페이지가 저절로 펼쳐졌다. 안쪽은 표면보다 훨씬 더 기이했다. 종이가 아닌, 얇은 막으로 이루어진 듯한 페이지에는 아까 표면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문양들이 더욱 크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검은 구멍이 존재했다.
구멍은 마치 모든 빛과 소리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지후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보관소의 지하 3층이 아니라, 끝없는 우주의 심연 가장자리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저 아래로는 무한히 떨어지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고, 그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크기의 촉수들이 뒤틀리고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공포가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단순한 생존 본능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광기로 물든 절망이었다. 인간의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편린이, 그의 눈앞에서 거침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는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어둠의 심연을 새겨 넣는 듯했다. 그는 팔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책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끼이익…
책이 바닥에 닿자마자, 갑자기 선반이 통째로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중한 철제 선반이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그 위에 쌓여 있던 고문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먼지 구름이 지후를 덮쳤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쏟아져 내리는 서류와 책더미 사이에서, 여전히 검고 불길한 광채를 내뿜는 기이한 책이 보였다.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속삭임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정신 속에서만 맴돌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의 현실 공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살려줘….”
지후는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내며 뒤돌아 달려나갔다. 이 공간에서, 이 고문헌 보관소의 지하 3층에서, 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고대의 힘과 우연히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힘은,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뒤편에서,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끔찍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지하 3층 전체가 흔들렸다. 지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살아남아야 했다. 이 진실을 누구에게든 알려야 했다.
하지만, 그가 달아난 복도의 끝에서, 또 다른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마치 우주 공간을 뚫고 나타난 균열처럼, 검고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형태는 끊임없이 변형되었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눈동자가 지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지후는 자신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더 이상 그가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