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습기가 지하 깊숙한 동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횃불의 불꽃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어둠이 더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렸다. ‘새벽불꽃’ 반란군의 은밀한 심장부, 사령실이었다. 탁자 위에는 낡고 닳은 가죽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강하준은 그 위에 험준한 손가락을 짚은 채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의 눈빛은 횃불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듯했으나, 그 속에는 한없이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사흘째입니다, 수장님.”
세라의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늘 차분하고 이성적인 그녀의 음성에도 미약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깡마른 몸을 의자에 기댄 채였지만, 그녀의 두 눈은 강하준의 옆모습을 응시하며 흔들림 없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제국의 수확대는 ‘풍요의 낫’ 곡창 지대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정규 병력 외에, 그림자 감시병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소규모 침투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도를 향한 강하준의 시선은 굳건했다. 손가락이 짚은 곳은 제국의 거대한 곡창, 수많은 백성의 피와 땀으로 일궈진 ‘풍요의 낫’이었다. 이제는 제국군만이 그 풍요를 탐하고 있었다.
“아이들까지 굶주리고 있습니다. 곡물은 썩어가는데, 정작 백성은 입에 풀칠도 못하고… 이게 말이 됩니까?”
강하준의 곁을 맴돌던 검은돌이 주먹으로 벽을 ‘쿵’ 하고 내리쳤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전사로서의 무력감,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길 같았다.
“진작에 쳐들어갔어야 합니다! 놈들의 심장에 칼을 박았어야 한다고요!”
“닥쳐, 검은돌.”
세라가 낮게 읊조렸다. “무모한 돌격은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우리는 병사 이전에, 지킬 것이 있는 백성입니다.”
“그럼 그냥 굶어 죽으란 말입니까? 앉아서 제국의 처분을 기다리란 말입니까?” 검은돌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수장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모두 함께 가겠습니다!”
강하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이제 ‘풍요의 낫’에서 제국 수도의 한 지점으로 옮겨가 있었다. 그곳은 ‘검은 탑’이라 불리는 건물이었다. 외견상으로는 제국의 거대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었으나, 실상은 제국 정보부의 심장부라는 소문이 파다한 곳.
“세라.” 강하준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자네의 계획은 여전히… ‘검은 탑’인가?”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국의 봉쇄가 이렇게까지 철저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정면 돌파는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방법은… 놈들의 눈과 귀를 훔치는 겁니다.”
“정보부의 심장을 훔치겠다?” 검은돌이 코웃음을 쳤다. “그곳에 침투하느니 차라리 ‘풍요의 낫’에 정면으로 뛰어드는 게 살 확률이 더 높겠습니다! 그곳은 개미 한 마리도 그냥 드나들 수 없는 곳입니다.”
“정면은 무리입니다.” 세라의 눈은 강하준을 향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건, 제국이 어디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배치했는지, 보급 경로는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풍요의 낫’에서 수확한 곡물을 어디로 빼돌리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그 정보를 손에 넣는다면, 우리는 놈들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습니다.”
강하준은 지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되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세라는 솔직했다. “발각되면 죽음입니다. 살아 돌아온다 해도… 모든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는…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였다. 동굴 입구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어린 정찰병 리안이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수… 수장님! 큰일입니다!”
강하준과 세라, 검은돌의 시선이 일제히 리안에게로 향했다.
“제국… 제국군입니다! ‘낫칼’ 부대… 그들이… 우리 은신처의 수원지 근처까지 왔습니다!”
‘낫칼’ 부대. 제국의 특수 병력.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반란군을 색출하고 말살하는 데 특화된 정예 부대였다. 그들이 수원지 근처까지 왔다는 것은… 이들의 거처가 발각될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했다. 끔찍한 정적 속에 긴장감이 돌았고, 동굴 전체가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다.
“놈들이 어떻게…!” 검은돌이 이를 갈았다.
세라의 얼굴에서도 평정을 가장한 균열이 보였다. “수원지라면… 이곳까지 도달하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매복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 이동해야 합니다!”
강하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지만,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무모한 돌격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희박한 성공률의 첩보전을 택할 것인가. 그러나 이제는 선택의 여지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놈들이 이곳을 덮치기 전에, 뭔가 해야만 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하지만 어떤 움직임이… 그들을 살게 할 수 있을까.
강하준은 낡은 지도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검은 탑’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차갑고 단단하게, 강철처럼 굳어 있었다.
“놈들은 우리가 숨어있는 줄 알았겠지만… 우리가 숨은 것이 아니다. 때를 기다렸을 뿐.”
그의 눈빛이 동굴의 모든 이들을 스캔했다. 어린 리안의 공포, 검은돌의 분노, 세라의 냉철함 속에 비치는 불안감.
“세라.” 강하준이 지시했다. “계획대로 진행한다. ‘검은 탑’이다.”
세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수장님… 놈들이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당장은 도피가 우선….”
“도피?” 강하준은 코웃음을 쳤다. “도피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우리는 늘 쫓기는 신세였다. 언제까지 그림자 속에서 살 텐가?”
그는 횃불을 들어 올렸다. 붉은 불꽃이 그의 결연한 얼굴을 비추었다.
“우리는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이번엔 우리가 놈들을 사냥할 차례다.”
어둠 속, ‘검은 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도의 한 점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새벽불꽃은 과연 타오를 수 있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