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골짜기, 인적 드문 폐사지에 덩그러니 놓인 돌탑 하나를 김진우는 지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낡은 등산화가 푹푹 빠지는 낙엽 더미를 헤치고 여기까지 온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고고학 연구실의 잡다한 업무에 치여 번아웃 직전이던 그는, 우연히 낡은 문헌에서 ‘시간의 틈새를 엿본 자들의 은신처’라는 알 수 없는 문구를 발견하고는 홀린 듯이 이곳으로 왔다. 비록 공식적인 학회에서는 미신 취급받는 이야기였지만, 진우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미지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빌어먹을… 진짜 아무것도 없네.”
그의 툴툴거림은 메아리조차 없는 깊은 산속에서 맥없이 흩어졌다. 손에 든 삽은 이미 녹이 슬기 시작했고, 삽날은 바위에 부딪혀 몇 번이나 이가 나갔다. 그가 파헤치던 곳은 무너진 본전의 터였다. 잡초와 덤불이 무성했지만, 희미하게나마 옛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진우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삽날을 흙에 박아 넣었다.
‘제발… 제발 뭔가라도.’
그 순간, ‘팅!’ 하는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돌멩이가 아니었다. 삽날이 긁고 지나간 흙 아래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돌덩이였다.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었다. 흙을 털어내자 드러난 것은 돌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쌓아 올린 벽돌 같은 것이었다.
“이게… 뭐야?”
그는 허둥지둥 손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돌벽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넓었다. 덤불을 걷어내고 흙을 긁어내자, 마침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것은 사람이 겨우 한 명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돌문이었다. 문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진우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피로를 잊게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돌문을 밀어보았다. 뻑뻑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훅, 하고 안쪽에서 묵은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퀴퀴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진우의 코끝을 스쳤다.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진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가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뱀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참을 걸어 내려갔을까. 통로는 갑자기 넓어지면서 거대한 동굴 같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기묘한 형상의 돌들이 솟아 있었고,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동굴의 가장 안쪽, 거대한 돌기둥들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중심에는, 직경 2미터쯤 되는 둥근 돌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진우의 시선은 제단의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마치 우주의 조각이라도 되는 듯한 검푸른 돌멩이에 고정되었다. 돌은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미세한 빛의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돌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주변의 빛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듯, 주변의 어둠마저 그 돌 주변에서는 더욱 깊어지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진우는 홀린 듯이 제단으로 다가갔다. 차가운 돌 제단의 표면을 따라 손을 뻗어, 검푸른 돌멩이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전율이 몰려왔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돌멩이는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미약하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돌멩이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푸른빛이 갑자기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렬한 빛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가늘게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청을 때리는 듯한 웅웅거리는 소리가 뇌를 흔들었다.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듯한 비현실적인 감각. 시야가 일그러지고 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어지러움 속에서, 진우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으윽…!”
순식간이었다. 빛이 잦아들고 소리가 사라졌다. 발아래 단단한 땅이 느껴졌지만, 그 모든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진우는 휘청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겨우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더 이상 폐허의 동굴이 아니었다.
왁자지껄한 소리. 낯선 사람들의 웅성거림. 코를 찌르는 향긋한 풀내음과 꼬릿한 짐승의 냄새. 눈앞에는 기와지붕이 겹겹이 이어진 거대한 성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성벽 아래로는 흙먼지를 폴폴 풍기며 마차가 오가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낯선 옷차림이었다. 비단 옷을 입은 양반들부터, 짚신을 신고 베옷을 입은 서민들까지, 그의 눈에는 마치 사극 드라마 촬영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귓가에 들리는 언어는 분명 한국어였지만, 억양이나 어휘가 사뭇 달랐다.
“아이고, 저 노름꾼은 또 어디서 돈을 다 잃었대?”
“쯧쯧, 저러다 제 명에 못 죽지.”
진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폐사지 동굴의 제단에 있었다. 그리고 그 검푸른 돌멩이를 만졌다.
‘설마… 설마 내가… 시간여행을 한 건가?’
몸이 저절로 떨렸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흥분이 밀려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시장 한복판의 좁은 골목이었다. 방금 전까지 눈을 떴던 동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진우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화려한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품이 넓은 갓을 쓴 노인이었다. 노인의 허리춤에는 은빛 비녀처럼 생긴 장신구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 끝에는 묘한 푸른빛을 띠는 작은 돌이 박혀 있었다. 동굴 속 제단에 박혀 있던 그 검푸른 돌과 색깔과 빛깔이 너무나도 흡사했다.
노인은 진우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노인의 시선이 마치 자신을 통해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또다시… 기척이 느껴지는군. 조율되지 않은 파동이라… 흠.”
노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우는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진우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곳은 너희 시대의 공간이 아니다, 이방인아.”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진우는 잔뜩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진우의 손바닥에 남아있던 검푸른 돌의 온기가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또다시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눈앞의 풍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장의 소음이 멀어지고, 사람들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아… 안 돼!”
진우는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몸이 사정없이 뒤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격렬한 감각과 함께, 강렬한 푸른빛이 다시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
“흡… 헉…!”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바닥은 흙투성이였다. 폐사지 동굴의 축축한 흙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플래시를 켜둔 채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이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폐사지 동굴로 돌아와 있었다.
눈앞의 제단, 그리고 그 한가운데 박혀 있던 검푸른 돌멩이. 돌멩이는 아까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이젠 그 빛이 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진우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돌멩이 속의 푸른 입자들이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진우는 거친 숨을 고르며 제단으로 손을 뻗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너무나 생생한 경험이었다. 그는 분명히 다른 시대로 넘어갔다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돌과 같은 힘을 가진 듯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의 마지막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진우는 조심스럽게 돌멩이를 만졌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격렬한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은, 이 돌멩이가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방금 경험한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알았다. 이 검푸른 돌멩이가 단순한 돌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고대, 어떤 강력한 마법적 힘을 지닌 존재들이 만들어냈거나 사용했던 유물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이 폐사지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진우의 심장이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거대한 문이 열린 듯한 설렘과 함께, 이 돌멩이의 비밀을 파헤쳐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시간의 틈새를 엿본 자들의 은신처.’
그 낡은 문헌의 한 구절이 다시 그의 뇌리를 스쳤다. 진우는 검푸른 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그가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은, 이제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거대한 여정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