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유리잔 속의 폭풍**
짙은 앰버색 위스키가 담긴 잔을 기울이자 얼음 조각이 ‘짤그랑’ 소리를 냈다. 육중한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수놓인 밤하늘은 언제나처럼 화려했지만, 민준의 눈빛은 그 불빛들을 담아내지 못했다. 수현은 팔짱을 낀 채 맞은편 소파에 앉아, 그가 잔을 들어 올리는 매 순간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정확히 일 년 전, 그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이제 다 끝났어, 수현아”라고 속삭이며 비웃던 그 손목이었다.
“너무 마시는 거 아니야, 민준아? 오늘 중요한 계약 앞두고 있잖아.”
수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평온해서, 얼핏 들으면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구의 충고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더 이상 수현의 말에서 우정을 읽을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의 미간은 깊은 주름을 만들며 일그러졌다.
“네가 그걸 왜 걱정해? 나 걱정하는 척 그만해. 역겨우니까.”
피식,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났다. 수현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겹다니, 너무 심한 말 아니니? 난 그저 네 오랜 친구로서, 네가 잘 되기를 바랄 뿐인데.”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비수처럼 민준의 심장을 꿰뚫었다. ‘오랜 친구’. 그 단어가 민준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 거대한 모래폭풍이 몰아치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지난 몇 주간 벌어진 일들을 되짚었다. 거래처의 이상한 태도, 한순간에 증발해버린 중요한 자료들, 심지어 집안에서 발견된 낯선 흔적들까지.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그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수현이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대체? 설마 내 파일을… 아니, 말도 안 돼.”
민준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벌써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수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섰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글쎄, 무슨 짓을 했을까? 네가 뭘 걱정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 혹시 네가 지난번에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친구의 것을 빼앗으려던 그런 비열한 짓이라도 한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눈은 가늘게 뜨고, 입술은 차갑게 휘어졌다. 민준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닥쳐! 그건 네가 먼저…!”
“내가 먼저 뭘? 내가 먼저 네 성공을 질투해서 네 등 뒤에 칼을 꽂았다고? 아니면 내가 먼저 네 소중한 모든 걸 빼앗았다고?”
수현은 민준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고급 실크 셔츠가 보기 좋게 구겨졌다. 민준은 놀랐다. 그의 눈에 비친 수현은 더 이상 그가 알던 나약하고 상처받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맹수처럼 번뜩였고,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나한테 했던 짓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어. 매일 밤 꿈속에서 네 웃음소리가 들렸어. ‘이수현은 이제 끝이야!’라고 외치던 그 잔인한 웃음소리가.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칼을 갈았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네가 가장 고통스러워할지, 어떻게 하면 네가 나보다 더 처절하게 무너질지.”
수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폭풍처럼 몰아쳤다. 민준은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공포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괴물을 만들어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짓밟았던 존재가 지금, 고개를 들고 자신을 향해 발톱을 세우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말해, 대체 무슨 짓을…”
“궁금해? 그럼 직접 확인해봐. 지금쯤이면 네 소중한 ‘친구’들이, 네가 얼마나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인지 아주 자세히 알게 됐을 시간일 텐데.”
바로 그 순간, 민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는 계약을 코앞에 둔 핵심 투자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민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손을 들어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수현이 그보다 먼저 움직였다.
“이게 뭘까? 지금 이 상황에서 널 찾는다는 건,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뜻이겠지?”
수현은 민준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더니,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수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이민준 이 새끼! 네가 감히 이런 식으로 우릴 속여?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당장 해명해! 네가 보냈다는 그 기밀 문서 파일… 엉터리 위조에다가 온갖 치부가 다 드러났잖아!”
민준의 눈동자가 공포로 가득 찼다. 그는 몸을 뒤로 휘청였다. 수현의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의 피땀 어린 노력과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명성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리는 소리였다.
수현은 민준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민준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휴대폰에서는 투자자의 분노에 찬 고성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현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상처와 복수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때, 민준아?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모든 걸 잃어버리는 기분은?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네 손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이 처절한 기분 말이야.”
그녀는 민준의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의 눈을 보게 했다. 민준의 눈동자에는 배신감, 절망, 그리고 미처 다 표출하지 못한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네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는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씩,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잔인하게 빼앗아 갈 거야. 네가 내뱉었던 비웃음의 대가, 이제부터 내가 받아줄게.”
수현은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달콤한 독처럼 섬뜩했다. 민준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그의 세상은, 유리잔 속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무자비하게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는, 이제 막 비로소 생명의 빛을 찾은 듯한 이수현이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