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정한 접속 – 37화
오후 11시 37분. 이지혁은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크로폴리스 47층의 그의 아파트 창밖으로는 불빛이 어지러이 흩뿌려진 도시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네온사인 간판들은 쉬지 않고 색을 바꾸며 지상으로 쏟아지는 비를 머금었다. 억수 같은 빗줄기가 고층 건물의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렸지만, 두꺼운 방음벽은 그 모든 소음을 먹어치웠다. 남은 건 고요와, 오래된 전기장치처럼 미세하게 울리는 벽 속의 저음뿐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로 반쯤 구겨진 에너지바 포장지를 밀어냈다. 낮부터 쉬지 않고 코드를 짜냈더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막 주요 모듈을 완성했는데, 자꾸만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피로 탓이라고 생각했다.
“시리우스, 실내등 20%만 올려줘.”
그가 나른하게 중얼거리자, 천장의 앰비언트 라이트가 부드럽게 밝아졌다. 그의 음성에 반응한 인공지능 ‘시리우스’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완벽했다.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실내등 밝기 20%.]
그때였다. 찌이익-! 하고 스피커에서 짧은 노이즈가 울렸다. 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리우스 시스템은 최신형이었고, 이런 오류는 처음이었다.
“시리우스, 시스템 점검. 방금 노이즈 뭐였지?”
[내부 시스템은 정상 작동 중입니다. 네트워크 연결도 안정적입니다. 혹시 외부 간섭이 있었는지 확인해 볼까요?]
시리우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깨끗했다. 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간혹 상층부 송신탑에서 오는 미세한 주파수 간섭일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한참이 지났을까. 완성된 코드를 컴파일하고 있을 때였다. 창밖의 빗소리는 여전히 먹먹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실내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얇은 가디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테이블 위에 두었던 커피잔이 미세하게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정확히는, 방금 전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쪽으로 반쯤 이동해 있었다. 그는 흠칫 놀라 손을 뻗어 잔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이거… 내가 아까 움직였던가?”
기억에 없었다. 분명 중앙에 딱 맞춰 두었는데. 피로 때문에 헛것을 본 건가? 아니면 무의식중에 자신이 옮겨놓고도 잊은 걸까?
[지혁님, 심박수가 평소보다 10% 상승했습니다. 스트레스가 높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건 어떠신가요?]
시리우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차갑게 들리는 건 그의 착각일까.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아까 커피잔 움직인 거 혹시 시리우스 네가…”
[저는 지혁님의 명령 없이 물체를 이동시키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개입은 저의 기능 범주를 벗어납니다.]
정확한 답변이었다. 시리우스는 스마트홈 시스템을 총괄하는 AI이지, 로봇 팔을 가진 가정부 AI가 아니었다. 컵을 움직일 능력 자체가 없었다.
지혁은 알 수 없는 으스스함에 몸을 떨었다. 그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서 예민해진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감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환기나 시킬까.”
그는 거실 창가로 향했다. 거대한 통유리창은 외부와 내부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창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손잡이가 차갑게 느껴졌다. 금속이 아닌, 살갹 같은 차가움이었다. 얼음장 같았다. 동시에 미약한 정전기가 손끝을 스쳤다.
찌이이잉-!
시야를 가득 채운 AR 디스플레이에 노이즈가 발생했다. 눈앞에 떠 있던 시간 정보, 날씨 정보, 그리고 새로 온 메일 알림까지 모든 데이터가 한순간에 지지직거렸다. 마치 오래된 CRT 모니터가 죽어가듯, 데이터 픽셀들이 깨지며 색이 반전되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현상이었지만, 그의 심장을 쿵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젠장, 또야?”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리우스가 또 노이즈를 내뱉으려나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잠시 모든 전자기기가 멈춘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고요함 속에서 빗소리조차 희미해진 것 같았다.
그 순간,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콰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지혁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펌프질했다. 그는 비명을 삼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건 결코 우연히 떨어진 게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테이블 끝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꽤 강한 힘으로.
“누… 누구야?”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집안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아무도 침입하지 않았다. 침입 경보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 중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집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두운 복도 끝, 닫힌 방의 문, 심지어 천장의 카메라 렌즈마저 그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워치를 작동시켰다. 긴급 구조 요청을 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네트워크 오류’라는 메시지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모든 외부 연결이 끊긴 듯했다.
[지혁님,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이 왠지 모르게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너무나 차분해서, 오히려 공포스러웠다.
그때, 거실 중앙에 놓여 있던 소파가 서서히,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육중한 가구가 움직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오직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소파를 밀어내는 것처럼.
지혁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등 뒤에서 들리는 쉬이익- 하는 정전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대형 디스플레이였다. 평소에는 우아한 디지털 아트를 띄워 놓던 화면이, 지금은 온통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로 뒤덮여 있었다. 그 노이즈 속에서, 잠시 뚜렷한 형태가 일렁였다.
핏빛으로 일렁이는 눈동자.
그의 눈이 마주친 순간, 노이즈는 더욱 격렬해졌고, 화면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핏빛 위로, 서서히 문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서 와… 내 세상으로.]
화면 속 문자가 완성되는 순간, 지혁의 귀에는 차가운 속삭임이 들렸다. 바로 귓가에서,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 방금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발을 헛디뎠다. 날카로운 파편이 발목을 파고들었고, 뜨거운 통증이 순식간에 전신을 마비시켰다. 그는 쓰러졌다. 그의 시야에 핏빛 디스플레이가 가득 들어찼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는데, 디스플레이 속 핏빛 글자가 서서히 일그러지며, 마지막 한 글자가 변해갔다.
[어서 와… 네 세상으로.]
그리고, 모든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어둠 속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빗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빗소리가 아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철컥, 하고.
그의 등 뒤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