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돌바닥이 발밑에서 삐걱거렸다. 한서진은 낡은 마법 램프가 뿜어내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비좁은 통로를 묵묵히 걸었다. 그의 등 뒤로, 묵직한 대검을 멘 강민혁이 투박한 발걸음으로 뒤따랐고, 그들의 옆으로는 김유진이 지팡이에 박힌 마정석을 어루만지며 주변을 경계했다. ‘검은 심장 미궁’이라 불리는 이곳은 새롭게 발견된 던전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고 위험한 곳으로 꼽혔다. 복잡한 지형과 끊임없이 변하는 마법 함정들 때문에 탐험가들이 늘 애를 먹는 곳이었다.
“서진아, 이쪽이 맞는 길인가? 벌써 세 번째 막다른 길인데.”
민혁이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째 이 미궁의 깊은 곳을 헤매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은 이곳뿐입니다, 선배님. 하지만… 무언가 이상합니다.”
서진은 낡은 양피지 지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빛 속에서도 마치 밤하늘처럼 깊었다. 그는 단순히 길을 찾는 데 그치지 않았다. 주변의 마나 흐름, 미묘한 공기의 변화, 심지어 돌벽의 균열까지도 놓치지 않고 분석하는 중이었다.
“이 앞은 분명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공간입니다. 하지만 마나의 잔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누군가 먼저 다녀갔거나, 혹은… 강력한 마법으로 봉인된 공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말에 유진이 지팡이를 바닥에 톡톡 두드렸다.
“저도 강한 저항을 느꼈어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아요. 일반적인 미궁의 벽과는 달라요.”
셋은 좁은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뻥 뚫린 벽만이 존재할 뿐. 하지만 서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벽을 이루던 돌덩이들이 일렁이며 거대한 문양을 드러냈다. 고대 마법의 봉인진이었다.
“이런… 이걸 어떻게 열어?” 민혁이 감탄 반, 좌절 반의 목소리로 물었다. 봉인진은 복잡하고 정교했다. 웬만한 마법사로는 해제는커녕, 건드리기만 해도 역류하는 마나에 당할 위험이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서진은 눈을 감고 손가락을 봉인진 위에 얹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와 봉인진의 문양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잠금장치의 열쇠를 찾아내듯, 그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마법적인 지식과 직관,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이 한데 어우러진 움직임이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나의 장막이 푸스스, 하고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구궁!
정적을 깨고 거대한 돌문이 서서히 옆으로 밀려났다. 눅눅한 공기와 함께 퀘퀘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으스스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문 너머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서진아, 너 진짜… 대단하다.” 민혁이 혀를 내둘렀다. 이런 식으로 미궁의 비밀을 풀어내는 건 언제 봐도 놀라운 일이었다.
“조심하십시오. 이 정도 봉인이라면, 안에는 분명 중요한 것이 있거나, 아주 위험한 것이 잠들어 있을 겁니다.”
서진의 경고에 민혁과 유진은 무기를 고쳐 쥐고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꽤 넓은 원형의 방이었다. 램프의 빛이 닿는 곳까지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돌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 낡은 책 몇 권과 깨진 항아리가 뒹굴고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오랜 시간 누구도 드나들지 않은 듯했다.
“텅 비었네? 아무것도 없는 건가?” 민혁이 실망한 듯 말했다.
유진이 테이블로 다가가 낡은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아니요, 민혁 선배님. 이곳은… 분명히 누군가 사용했던 흔적이 있어요. 이 책들은 일반적인 마법서가 아니라…”
그때였다. 서진이 방의 가장 안쪽, 테이블과는 정반대편의 벽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일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저기… 뭔가 있습니다.”
민혁과 유진의 시선이 서진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램프의 불빛이 미처 닿지 않던 곳. 서진은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작은 마나 구슬을 띄워 어둠 속으로 보냈다. 푸른 마나 구슬이 나아가며 어둠을 걷어내자, 비로소 그들은 그곳에 놓인 것을 볼 수 있었다.
피.
새빨간 피가 차가운 돌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웅덩이 한가운데,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이런, 젠장!”
민혁이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갔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서야 남자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역시 탐험가 차림을 하고 있었고, 꽤 유명한 탐험가 그룹의 일원인 박태준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이미 싸늘하게 식은 몸은 굳어 있었다. 얼굴에는 공포와 고통이 뒤섞인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박태준 씨잖아! 이 사람이 왜 여기에… 그리고 대체 누가?” 유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경악과 공포가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민혁이 허리를 숙여 태준의 몸을 살폈다. “죽은 지 꽤 된 것 같아. 그리고… 칼에 찔렸군. 한 방에 치명상.”
서진은 민혁처럼 시체를 살피는 대신, 방 전체를 둘러보고 있었다. 특히 그가 신경 쓴 곳은, 방금 그들이 들어온 문이었다. 닫힌 문, 그리고 봉인진.
“이 방은 저희가 봉인을 해제하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닫혀 있었습니다.” 서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래, 그렇다는 건… 박태준 씨가 죽은 후에 봉인된 게 아니라는 거잖아. 박태준 씨가 이 안에 갇혀서 죽었다는 건데, 누가?” 민혁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서진은 시체의 옆에 굴러떨어져 있는 단검 하나를 가리켰다. 단검의 손잡이 부분에는 희미하게 혈흔이 묻어 있었다. “이 단검은 박태준 씨의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오기 전, 박태준 씨를 살해한 범인이 이 방 안에 있었습니다.”
유진이 몸을 떨었다. “그럼… 그럼 범인은 아직 여기 있다는 거야? 우리 몰래 숨어있던 건가?”
“아니요.” 서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피웅덩이와 시체의 위치, 그리고 그 주변의 미묘한 흔적들을 훑고 있었다. “제가 봉인을 해제할 때까지 이 방 안에서 마나의 흔적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즉, 범인은 저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 방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민혁이 벌떡 일어섰다. “말도 안 돼! 그럼 대체 범인은 어떻게 나간 거야? 이 방은 우리가 봉인을 풀기 전까지는 완벽한 밀실이었잖아! 우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다고!”
고요함 속에 민혁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서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배님, 저희는 지금 완벽한 밀실 살인 사건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쓰러진 박태준의 시체와, 방금 전 봉인이 풀린 거대한 돌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범인이 사라질 수 있는 트릭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트릭을 지금부터 찾아낼 생각입니다.”
차가운 미궁의 공기가 그들의 숨을 멎게 했다. 이제 사건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