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것은 소라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끈이자, 때로는 숨통을 조이는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매년 겨울, 첫눈이 흩날릴 때마다 그녀는 어릴 적 지훈과 함께 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던 그 순간을 되감았다. 따스한 입김을 내뿜으며 “정말?” 하고 묻던 그의 눈빛, 그리고 “응, 꼭이야.” 하고 다짐하던 자신의 목소리까지 선명하게.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왔고,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던 마른 날씨 끝에, 드디어 첫눈 소식이 들려왔다. 소라가 운영하는 작은 책방 ‘기억의 조각’ 창밖으로, 새벽부터 하얀 눈송이들이 솜털처럼 내려앉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쌓이기 시작한 눈은 오후가 되자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을 기세로 맹렬히 쏟아져 내렸다. 약속했던 그 날처럼.
소라는 책장 사이를 오가며 먼지를 털어내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모든 책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은 이미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 오래된 추억의 조각들을 더듬고 있었다. 십 년.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그녀는 변하지 않는 한 조각의 기억을 붙들고 살았다. 그의 얼굴은 흐릿해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고, 그의 따뜻한 손길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오늘 같은 날엔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이 최고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소라는 텅 빈 책방 카운터에 앉아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봤다. 하얀 눈꽃은 끊임없이 피어났다가 이내 땅에 닿아 스러졌다. 마치 그녀의 희망처럼, 수없이 피어났다가 결국 차가운 현실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똑, 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라가 고개를 들었다. 책방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의 카페 주인 아줌마가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소라 씨, 이 추운 날 혼자 앉아있으면 얼어 죽겠어. 따뜻한 코코아 좀 마셔.”
아줌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코코아를 건넸다. 소라는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고맙습니다, 아줌마.”
“뭐가 고맙다는 거야. 근데 오늘은 일찍 문 닫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손님도 없을 것 같고.”
소라는 잠시 망설였다. 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 그녀는 늘 그랬듯이 해질녘까지 책방 문을 열어두곤 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그가 이곳을 찾아올까 봐.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약속의 날이었으니까.
“네, 그러려고요. 조금 일찍 닫을까 생각 중이었어요.”
“그래, 잘 생각했어.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가.”
카페 아줌마는 소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책방을 나섰다. 텅 빈 공간에 다시 혼자 남은 소라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쌉쌀한 맛이 차갑게 얼어붙었던 가슴을 서서히 녹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더는 기다림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다고. 이제는 그녀가 움직일 차례라고.
오후 다섯 시, 소라는 ‘기억의 조각’ 문을 닫았다. 셔터를 내리는 손길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거리는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발자국마다 뽀드득 소리를 냈다. 그녀는 익숙한 골목을 따라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춤추듯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하지만 소라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그와 약속했던 장소.
오래된 시계탑 아래, 그들이 늘 약속을 잡던 작은 카페 ‘하얀 눈꽃’. 간판조차 흐릿해진 그곳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소라의 발걸음이 망설임 끝에 카페 앞을 지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은 카페 맞은편 공원 벤치에 멈췄다.
새하얗게 쌓인 눈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온몸을 눈송이로 뒤덮은 채, 작은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뒷모습.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익숙한 그 뒷모습에 소라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스케치북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예전보다 조금 더 넓어진 것 같았고, 옆모습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지훈…’
소라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려는 이름을 간신히 삼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혹시, 그일까? 아니면 그저 닮은 사람일까?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이 남아있을까? 그가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수많은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자는 스케치북을 덮고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어, 괜찮아. 눈이 많이 와서… 작업은 좀 쉬고 있어.”
“…응. 아직까지는…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어. 걱정하지 마.”
“응. 곧 갈게.”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소라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걸까. 왜 이 눈 오는 날, 약속 장소 맞은편에서 혼자 앉아 있었던 걸까.
지훈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전화를 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수북이 쌓인 벤치에서 일어설 때, 그의 몸이 살짝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소라의 눈과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 그의 시선이 소라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빈 시선이었다. 그는 소라를 알아보지 못했다.
쿵, 하고 소라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존재는 이미 지워진 것일까. 잊힌 추억 속에 갇힌 건 자신뿐인 걸까. 차가운 눈발이 그녀의 뺨을 스쳤지만, 그것이 눈물인지 눈송이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이내 뒤를 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소라가 용기를 내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의 모습은 눈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소라는 천천히 ‘하얀 눈꽃’ 카페 문을 열었다. 낡은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래된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카페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고소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주인 아주머니가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어머, 소라 씨! 다시 왔네. 혼자 왔어?”
소라는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따뜻한 코코아 한 잔 주세요.”
그녀는 늘 그와 함께 앉던 창가 자리로 향했다.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 십 년 전, 그와 마주 앉아 미래를 이야기하며 설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봤다. 하얀 눈송이들이 끝없이 춤추는 세상. 이제 약속 시간까지는 단 5분.
소라는 두 손을 모아 가슴께에 올렸다. 차가웠던 손이 조금씩 온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심장이 여전히 불안하게 뛰고 있었지만,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설령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 순간을 마주해야만 했다.
째깍, 째깍. 벽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5분, 4분, 3분… 시간이 흐를수록 소라의 숨은 더욱 가빠졌다. 마지막 1분이 남았을 때, 그녀는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그가 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있을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맑은 종소리가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소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 흰 눈을 뒤집어쓴 채,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리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희미하지만, 소라가 그토록 기다렸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라… 정말, 네가 왔구나.”
그의 목소리는 십 년 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변함없이 소라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눈꽃 속,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그의 존재는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그의 눈빛에 스치고 지나가는 아련한 그림자는 무엇인지, 소라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