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새벽
차가운 새벽 공기가 잿빛 골목의 척박한 땅을 훑고 지나갔다. 돌투성이 길바닥에는 핏자국처럼 말라붙은 오물과 정체 모를 먼지가 수북했다.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좁디좁은 골목길은 늘 습하고 어두웠으며, 비위 상하는 썩은 내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이곳은 황도 아라드론의 심장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리고 가장 잊힌 곳이었다. 제국이 쌓아 올린 거대한 환영 속에서 빛이 닿지 않는 유일한 그림자.
카인은 이 역겨운 공기에 익숙했다. 아니, 익숙해져야만 했다.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고단한 삶의 일부였다. 오늘도 그는 낡아빠진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골목 어귀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혹여 버려진 먹을거리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은 매번 쓰라린 실망으로 돌아왔지만, 그마저도 버릴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의 옆에서는 여덟 살 된 여동생, 미나가 앙상한 팔다리를 오들오들 떨며 카인의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미나의 창백한 얼굴에는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오빠… 추워…”
미나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카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미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여린 몸뚱이가 그의 품에서 가늘게 떨렸다.
“조금만 더… 뭐라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은 이제 카인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황도 아라드론은 찬란한 빛과 영광으로 가득한 도시라 했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한 제국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은빛 첨탑과 금빛 돔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영화는 잿빛 골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곳에서는 오직 굶주림과 병고, 그리고 제국의 무관심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때였다. 귓전을 때리는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거친 고함이 골목을 울렸다.
“비켜라! 이 빌어먹을 더러운 것들아!”
제국군의 순찰대였다. 번쩍이는 강철 갑옷과 위압적인 붉은 깃발이 좁은 골목을 가득 채웠다. 그들의 발소리가 잿빛 골목의 낡은 나무 판자 바닥을 짓밟을 때마다, 마치 땅 자체가 신음하는 것 같았다. 병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오만하고 잔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잿빛 골목의 주민들이 벌레 한 마리보다도 못하게 보인다는 것이 역력했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벽 쪽으로 바싹 붙었다. 미나는 카인의 등 뒤로 숨어들었고, 카인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아이를 더 단단히 감쌌다. 제국군 병사들은 거침없이 골목을 가로지르며, 낡은 수레를 발로 차 뒤엎고, 주저앉아 구걸하던 노인을 개처럼 질질 끌어냈다.
“이것들이 아직도 반항심을 버리지 못했군! 황제 폐하의 자비가 끝이 없는 줄 아느냐?!”
한 병사가 몽둥이를 휘둘러 쓰러진 노인의 등을 후려쳤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노인의 입에서 컥 하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터져 나왔다.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감히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분노와 함께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카인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병사의 갑옷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이었다. 황실 문장이 아닌, 뱀처럼 뒤틀린 촉수들이 거대한 눈을 감싸는 형상. 저주받은 표식처럼 느껴지는 그것은 제국군이 평소에도 달고 다니던 문장이었지만, 유독 오늘따라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무언가를 형상화한 것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저 문양을 볼 때마다 늘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자들은 그 어떤 죄도 죄책감도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저… 저 아이는 안 됩니다! 병이 깊어서…”
한 여인이 울부짖으며 병사들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열병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병사들은 냉정하게 여인을 뿌리치고 아이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아이는 꺽꺽거리며 울었고, 여인은 땅바닥에 엎어져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어머니! 어머니이!”
아이의 울부짖음이 멀어져 가는 병사들의 발소리에 묻혔다. 아이의 눈은 카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 작은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와 함께, 마치 심연의 어둠을 엿본 듯한 기괴한 얼룩이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그 작은 몸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카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린 미나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겹쳐졌다. 언제든 저 아이처럼 끌려갈 수 있다는 차가운 현실이 그의 목을 조여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가?’
분노가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동시에, 알 수 없는 공포가 그의 정신을 잠식하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제국군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아이의 눈에서 본 그 심연의 얼룩, 병사들의 갑옷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 그리고 황도 아라드론의 저녁노을에 비치는 불균형한 첨탑들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제국이 숭배하는 ‘영광’ 뒤에 도사리는, 인지할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느낄 때마다 찾아오는 소름 끼치는 공포였다. 마치 저 거대한 제국 자체가 어떤 거대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순찰대가 지나간 골목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정적은 이전과 달랐다. 침묵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이들의 신음과 흐느낌,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가 마치 거대한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
해질녘, 카인은 미나를 잠자리에 눕힌 후 조용히 잿빛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잿빛 골목 가장 깊숙한 곳,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낡은 주점으로 향했다. 이곳은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밀담이 오가는 장소였다.
주점 안은 어둡고 습했다. 촛불 몇 개가 간신히 실내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낡은 탁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노인, 엘드가 카인을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맑고 형형했으며,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과 지혜를 담고 있는 듯했다. 엘드의 손에는 낡고 해진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이상하게 뒤틀린 상형문자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혀 있는 그것은, 카인이 살면서 본 어떤 책보다도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오랜만이로구나, 카인.”
엘드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엘드 님. 제국군의 만행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카인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오늘 일어났던 일을 엘드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아이가 끌려가는 모습, 노인의 피, 그리고 병사들의 눈빛에 담긴 광기까지. 엘드는 묵묵히 카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침울했지만, 눈빛만은 흔들림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징발’은 그들이 더 깊은 어둠에 손을 댔다는 증거다.”
엘드의 말에 카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깊은 어둠이라니요?”
엘드는 두루마리를 굴려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늘어졌다.
“이 제국은 예전부터 존재하지 않는 신들을 숭배하고, 알 수 없는 힘에 기대어 번성해 왔다. 그들은 황제 폐하라는 가면 뒤에 숨어, 저 바깥의, 심연의 존재들과 거래하고 있지. 황도 아라드론의 첨탑들이 왜 그토록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지을 수 없는 건축물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바깥의 존재들이 이 세계에 발을 들이기 위한 문이자, 동시에 그들의 어두운 속삭임을 증폭시키는 도구에 불과하다.”
카인은 몸을 떨었다. 엘드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황제의 폭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거대하고, 소름 끼치는 진실이었다. 그동안 카인이 느껴왔던 불길한 예감,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징발은… 단순히 노예를 바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 혹은 그 이상의 것을 바치고 있지. 오래전부터 그랬다. 열병에 걸린 아이들, 영혼이 여린 자들이 주로 그들의 제물이 되었다. 그들을 통해… 저 심연의 속삭임이 이 세계로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이다.”
엘드의 눈동자가 잠시 초점을 잃는 듯했다. 마치 그 자신이 그 심연을 엿본 것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 두루마리는 제국이 탄생하기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금기의 기록이다. 우리 조상들이 이 어두운 진실을 알고 숨기려 했지. 제국은 인간의 왕국이 아니다, 카인. 그것은 꿈을 먹는 자들, 어둠 속에 도사리는 존재들의 그림자 왕국이다. 그리고 이제, 그 그림자가 이 세계를 완전히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카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지만, 동시에 차가운 분노가 명확한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미나를 비롯한 수많은 아이들이, 단순한 폭정의 희생양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공포스러운 의식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카인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다.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미나를, 그리고 잿빛 골목의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엘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잿빛 골목의 좁은 창문을 넘어,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황도 아라드론의 기괴한 첨탑들을 향했다. 그 첨탑들은 달빛 아래에서 더욱더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솟아 있었다. 그중 가장 높고 어두운 첨탑에서, 잠시 동안, 카인은 핏빛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섬광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눈이 먼 거리를 응시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설명할 수 없는 징조였다.
“우리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카인. 칼을 뽑고 저 거대한 어둠에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어두운 의식을 막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이 모든 세계가 심연의 그림자에 잠식될 것이다.”
엘드는 낡은 탁자 밑에서 투박한 단검 하나를 꺼내 카인에게 내밀었다. 단검의 손잡이에는 잿빛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오래된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제국의 문양과는 다른, 희미하지만 강렬한 저항의 의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씨가 모이면 태양이 될 수 있지. 가서,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라. 잿빛 골목의 모든 이들에게, 더 이상 침묵하지 말라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쳐라.”
카인은 단검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쇳덩이가 그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순수한 분노이자, 동시에 끓어오르는 용기였다.
그의 시선은 엘드를 지나, 다시 창밖의 어둠 속으로 향했다. 멀리서, 황도 아라드론으로부터 들려오는 듯한 낮고 으스스한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바람 소리도, 짐승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읊조리는 듯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섬뜩하게도, 그의 이름, 카인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카인은 단검을 꽉 쥐었다. 잿빛 새벽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의 결심은 강철처럼 굳어졌다. 그는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젠 그가, 그리고 잿빛 골목의 사람들이, 제국의 거대한 어둠에 맞서 불꽃을 피워 올릴 차례였다. 설령 그 불꽃이 타오르다 재가 될지라도, 그들은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이 빌어먹을 제국의 심장을 향해, 그들만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