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재로 변해버린 폐허 한가운데서, 나는 눈을 떴다.
김현우. 그게 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답답한 빌딩 숲에서 엑셀 시트를 붙들고 씨름하던 평범하디 평범한, 아니, 오히려 좀 더 무기력한 쪽에 가까웠던 삼십 대 남자. 그런 내가 지금은, 이름 모를 회색빛 세상에서 폐허가 된 잔해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목구멍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붙었고, 온몸의 근육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기억은 조각난 유리 파편처럼 흩어져 명확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지만, 딱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은 내가 알던 지구가 아니라는 것. 창문 너머로 보이던 뿌연 서울의 스카이라인 대신,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부서진 콘크리트와 뒤틀린 철근, 그리고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아련하게 펼쳐진 잿빛 황무지였다.
“젠장… 여기가 어디야.”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튀어나왔다. 입안에 고인 침조차 없어 혀는 거칠었다.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 간신히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묵직한 고통이 머리를 관통했다. 내 몸이 이렇게 망가졌었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있던 곳은 과거에는 분명 번화한 거리였을 터였다. 높이 솟아올랐던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거나, 아예 주저앉아 거대한 돌무덤이 되어 있었다. 아스팔트는 갈라지고 솟아올라 흉터투성이였고, 그 사이사이로 기괴하게 변형된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칙칙한 회색빛의 이파리들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간 듯 메말라 보였다.
하늘은 언제나 우중충했다.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햇빛 한 줄기 허락하지 않았다. 공기 중에는 쇠 비린내와 알 수 없는 흙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부패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곳은 죽은 세계였다. 아니, 죽어가고 있는 세계였다.
가장 먼저 찾아온 건 갈증이었다. 목을 축이지 않으면 이대로 말라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떼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붕괴된 건물 잔해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나아갔다. 발밑에서 깨진 유리 조각과 금속 파편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얼마나 걸었을까. 폐허가 된 광장 한가운데서 녹슨 분수대를 발견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분수대 안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다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때, 내 시야에 낡은 표지판 하나가 들어왔다. 원래는 뭔가 화려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겠지만, 지금은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희미하게 ‘수’라는 글자만이 보였다. ‘수’… 어쩌면 수원지나 우물을 뜻하는 걸 수도 있었다.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나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참을 걸었다. 흙먼지가 발에 달라붙고, 갈라진 입술은 피가 배어 나왔다. 저 멀리, 폐허 속에서도 유독 검게 그을린 구역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한 모습이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는 기괴한 형태의 풀더미를 발견했다. 회색빛 이파리들 사이로 보라색의 작은 열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게… 뭐지?”
먹을 수 있는 건가? 독이 있다면? 망설임이 컸지만, 굶주림과 갈증은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일단 물을 찾아야 해. 물.
마침내, 검게 그을린 구역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나는 작은 샘터를 발견했다. 바위틈에서 졸졸 흐르는 물줄기는 투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흙탕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샘물로 기어갔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에 닿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손으로 물을 움켜쥐고 얼굴을 묻었다.
“하아… 하아…”
흙냄새와 미약한 쇠 비린내가 섞인 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음료보다 달콤했다. 벌컥벌컥 몇 모금을 마시자, 비로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나는 주변을 살폈다. 샘물 주변은 비교적 온전했다. 검게 그을린 폐허의 한가운데서, 마치 이곳만 홀로 생존한 섬 같았다.
물이 나를 살렸다는 안도감도 잠시, 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식량. 이 기괴한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까 봤던 보라색 열매들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니 다시 돌아가서 몇 개 가져와 볼까?
그때였다. 귓가에 날카로운 ‘끼이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게 그을린 건물 잔해 사이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뭐… 뭐야 저건.”
그것은 벌레였다. 그러나 내가 알던 벌레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람 키만 한 크기에, 곤충처럼 단단한 외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집게발은 녹슨 칼날 같았고, 머리에는 여러 개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등에서는 거대한 날개가 꿈틀거렸는데, 그 날개는 마치 유리 조각을 이어 붙인 듯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저런 괴물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본능적으로 샘물 옆에 숨겨진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괴물을 지켜보았다.
괴물은 느릿느릿 주변을 배회했다. 붉은 눈은 마치 탐색하는 레이더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 몸은 땀으로 축축해졌고,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 저 괴물에게 들키면 죽을 것이다. 분명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괴물이 샘물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발견하지 못했기를 빌면서, 나는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괴물의 삐걱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흙먼지가 튀는 소리, 거대한 몸체가 움직이는 소리.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젠장… 젠장…”
괴물은 샘물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집게발 하나를 물속에 담갔다. 마치 물을 확인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괴물도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괴물이 물을 마시는 동안, 나는 바위 뒤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은 숨통을 조여왔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괴물이 샘물에서 물러났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괴물은 왔던 길을 되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괴물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살았다… 살았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왜 내가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곳이라는 것. 물 한 모금, 식량 한 조각, 안전한 잠자리 하나를 위해 생사를 걸어야 하는 곳.
나는 다시 샘물로 향했다. 괴물이 마셨던 물이라 찝찝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샘물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혹시 다른 생명체가 다녀간 흔적은 없는지, 아니면 이 괴물이 흘리고 간 어떤 것이라도.
그리고 샘물 옆, 바위틈에서 작은 싹 하나를 발견했다. 아까 봤던 회색빛 풀더미와는 달리, 연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뿌리채소 같은 것이 흙에 박혀 있었다.
“이건… 먹을 수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뽑았다. 뿌리에는 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망설임 끝에, 나는 작은 조각을 뜯어 입에 넣어보았다. 흙맛이 강했지만, 이내 알싸하면서도 미약하게 단맛이 느껴졌다. 독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작은 뿌리채소를 모두 뽑아냈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보라색 열매가 열린 풀더미를 찾아 다시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더 이상 갈증과 굶주림에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괴물에게서 도망쳤지만, 그것은 단지 첫 번째 관문이었을 뿐이다.
내게 주어진 것은 이 황폐한 세계,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뿐이었다. 김현우. 이젠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자였다. 머지않아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깔릴 터였다. 그 전에 안전한 잠자리를 찾고, 내일을 위한 식량을 확보해야만 했다.
살아남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낯선 세상에서, 나는 나만의 생존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폐허 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잡초처럼, 나는 악착같이 버틸 것이다. 그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멀리서 괴물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폐허는, 마치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