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서울, 12구역.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의 첨탑들이 밤의 장막을 찢고 우뚝 섰지만, 그 빛은 지상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내지 못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전부터 그래왔듯이, 높이 솟은 스카이웨이 아래는 언제나 녹슨 금속과 빛바랜 홀로그램 간판, 그리고 눅눅한 흙먼지가 뒤섞인 회색빛 풍경이었다. 이곳은 재활용 구역, 일명 ‘더미 스택’의 심장부였다. 고철 더미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이들은 더미가 뱉어내는 찌꺼기로 겨우 생을 이어갔다.
류혁은 이곳에서 낡고 좁은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 그의 작업실은 흡사 옛날 박물관 같았다. 기원전 기술부터 성층 시대 초기의 기기들까지, 온갖 유물과 잔해가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먼지 낀 작업대 위에는 손때 묻은 공구들과 해체된 회로들이 널려 있었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는 기괴한 데이터 코드들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의 오른쪽 눈에 박힌 광학 의안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주변을 스캔하고 있었다.
“하, 이 빌어먹을 데이터 암호화는 또 뭐야.”
혁은 끙 소리를 내며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쳤다. 스크린에 띄워진 오래된 데이터 칩의 정보는 끝없이 꼬여 있었다. 아마도 성층 시대 이전, 전 인류가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시작했던 ‘초연결 시대’의 유물일 것이다. 당시의 암호화 방식은 단순했지만, 그만큼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많았다. 그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놀려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드렸다. 인터페이스 포트가 박힌 그의 팔목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작업실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혁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난 배달 안 해. 고철은 저쪽이야.”
“배달이 필요해서 온 건 아닙니다, 류 혁 씨.”
차분하면서도 낮은 목소리였다. 혁은 그제야 작업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서 있는 그림자는 그의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단단한 체격에 재단된 듯한 고급스러운 정장. 그의 주변 공기마저 압도하는 듯한 위압감은 이 낡은 더미 스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구역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혁은 저런 옷 한 벌 값이면 자신의 작업실을 두어 번은 새로 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누구시죠? 이 구역은 처음 오신 것 같은데.” 혁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묻어났다.
그림자는 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혁의 의안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제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제가 류 혁 씨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 남자는 혁의 허락도 없이 작업실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낡은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그는 탁자 위에 작은 금속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혁의 의안이 상자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합금으로 만들어진 상자는 기원전 유물 특유의 묵직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보를 원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아주 오래된, 잊혀진 문명에 대한 정보.”
혁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군요. 이 구역엔 잊혀진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다 고철 취급받고 버려지죠.”
“제가 찾는 건 다릅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네오-서울 지하에 묻힌, 태초의 흔적에 대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그곳의 위치와 내부 구조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혁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태초의 흔적’. 단순한 고철 더미나 오래된 데이터 칩과는 격이 다른 이야기였다. 네오-서울의 지하에는 수많은 전설과 괴담이 떠돌았다. 거대한 지하 공동이 있고, 그곳에 선조들이 남긴 비밀스러운 도시가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 대부분은 마약에 찌든 부랑자들이나 꾸며낼 만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취급되었다.
“그런 건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혁은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동화일 수도 있겠죠.” 남자는 탁자 위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오래된 디지털 칩이 들어 있었다. 칩의 표면에는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혁의 의안이 재빨리 칩의 정보를 분석했다. 그 어떤 현존하는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대 합금과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암호화 방식.
“이게 뭔가요?” 혁은 저도 모르게 흥미를 느꼈다.
“선불입니다.” 남자는 칩을 혁에게 밀어 보냈다. “이 칩에 담긴 데이터를 해독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찾는 정보를 찾아오면… 보상은 상상 이상일 겁니다.”
“상상 이상?” 혁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려댈 수 있길래요?”
“류 혁 씨가 평생 작업실에서 모은 모든 유물을 사고도 남을 액수입니다.” 남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리고 평생 작업실 문을 닫고 은퇴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요.”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혁은 잠시 망설였다. 위험한 냄새가 났다. 이런 제안은 언제나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자신의 의안이 스캔한 칩의 정보는 그 어떤 사기꾼도 흉내 낼 수 없는 진품이었다.
“좋습니다.” 혁은 칩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정보를 찾지 못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류 혁 씨의 실력은 이미 수많은 루트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 어떤 고대 데이터도 류 혁 씨의 손을 거치면 빛을 발하더군요.”
혁은 칩을 작업대 위로 던졌다. 낡은 금속과 부딪히는 소리가 작업실에 울렸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정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가 문을 열기 전 말했다. “그리고… 이 정보에 대한 접근은 류 혁 씨 혼자만 해야 할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십시오. 이 도시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깊고, 빛은 생각보다 옅습니다.”
남자는 경고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삐걱거리는 문이 닫히고, 작업실에는 다시 혁 혼자만 남았다. 혁은 탁자 위 칩을 응시했다. 손바닥만 한 칩에서 발산되는 알 수 없는 에너지. ‘태초의 흔적’, ‘지하에 묻힌 도시’.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렸던 이야기가 갑자기 현실의 무게를 가지고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혁은 작업대 옆의 낡은 단말기를 켰다. 손가락을 빠르게 놀려 내부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자신만의 비공개 데이터베이스, 암시장 정보망, 그리고 심지어는 기업 보안망의 구석진 곳까지 긁어모은 정보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젠장, 정말로 이런 게 존재한단 말이야?”
초연결 시대의 건축 도면, 기밀 해제된 지질 조사 보고서, 그리고 네오-서울 초기 건설 프로젝트의 유출된 문서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잡동사니 정보 속에서, 혁의 의안이 번뜩였다. 거대한 도시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알 수 없는 형상의 지하 구조물 도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도면의 한쪽 구석에는, 기호처럼 보이는 고대 문자들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치 심장이 박동하는 듯한,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 있었다.
혁은 화면에 얼굴을 바싹 대고 그 흔적을 응시했다. 오랫동안 잊혀 있던, 그러나 지금 다시금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하 도시의 녹슨 심장이었다. 이 도시의 그림자가 얼마나 깊은지, 혁은 이제 막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탐험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것임을.
그는 무심코 칩을 쥔 손을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