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한은 낡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빗물에 희미하게 번진 주소, 그리고 그 아래 흐릿하게 찍힌 사진 한 장. 사진 속 여자는 분명 수아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지한이 기억하는 해맑은 미소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진은 수아가 사라진 지 한참 후, 어느 대학병원 앞에서 찍힌 것이었다. 그 사진을 건넨 이는 수아의 오랜 친구 박선영이었다. 그녀는 이 주소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며, 더는 캐묻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듯 말했다.
지한은 선영의 집을 떠나오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선영은 수아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눈에 띄게 불안해했고, 어떤 질문에도 명확한 답을 회피했다. 마치 수아의 그림자를 보호하려는 듯이. 하지만 선영이 마지막으로 건넨 쪽지 한 장은 지한에게 새로운 희망이자 동시에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깊은 숲 속의 오두막
제시된 주소는 도시 외곽의 인적 드문 산자락이었다. 구불구불한 숲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나무에 가려 겨우 형체만 보이는 낡은 오두막 한 채였다. 지한은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 소리, 나뭇가지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곳. 이토록 세상과 단절된 곳에 수아가 있었다는 말인가.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희미한 흙길을 따라 오두막에 다가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문에는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폐가처럼 보이는 이곳에서 과연 수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한은 포기할 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 그의 눈에 익숙한 색깔의 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오두막 앞 작은 텃밭 한구석, 잡초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낡은 손수건이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랬지만, 분명 수아가 즐겨 사용하던, 그와 함께 여행 갔을 때 잃어버렸다고 슬퍼했던 손수건이었다.
그 손수건을 만지는 순간, 지한의 머릿속에 아련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간을 거슬러, 그 여름날의 약속
“지한아, 우리 꼭 행복해지자. 나만의 비밀인데, 사실 난 나중에 아주 예쁜 집을 지어 살고 싶어. 숲 속에 숨겨진 작은 오두막 같은 집. 거기서 너랑 매일 아침 햇살 맞으며 커피 마시고 싶어.”
수아는 맑은 눈으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때 지한은 풋풋한 사랑에 취해 그 모든 꿈이 당연히 이루어질 거라 믿었다. 그날 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수아의 손수건을 찾아주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이거 엄마가 아끼던 건데! 고마워, 지한아.”
그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지한은 손수건을 가슴에 품었다. 수아가 이곳에 왔었다. 어쩌면 아직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불안이 뒤섞였다.
오두막 안의 단서
낡은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자, 퀴퀴하고 차가운 공기가 지한을 맞았다.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지만, 오랜 시간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은 듯 을씨년스러웠다. 작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침실 하나. 지한은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 작은 서랍장 위에는 먼지 쌓인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노트를 펼쳤다. 빽빽하게 채워진 글씨는 수아의 필체였다. 그녀의 일기장이었다.
“…몸이 점점 약해지는 걸 느껴. 숲 속의 오두막이 내 유일한 안식처가 될 줄이야. 지한이에게는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아. 내가 이렇게 아프다는 걸 알면… 너무 아파할 테니까. 그 아이는 나 없이도 행복해야 해.”
“…선영이가 몰래 찾아와 밥을 해주고 갔다. 고맙고 미안해. 내가 이 병을 숨기느라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아니, 지한이만은 알아서는 안 돼. 그의 기억 속 나는 항상 밝고 건강한 모습이어야 해. 그의 첫사랑은… 그래야 해.”
“…점점 더 심해지는 고통. 이제 더는 버티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지한이의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 미안해, 지한아. 사랑해. 나의 영원한 첫사랑.”
쓰라린 진실
지한의 손에서 노트가 떨어졌다. 그의 심장은 마치 칼로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수아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병을 혼자 감당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감추었던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알게 된 순간, 지한은 비로소 절규할 수 있었다. 수십 년간 억눌러왔던 슬픔과 후회,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는 오두막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했던 그 사랑의 깊이에 압도되었다. 손에 쥐고 있던 낡은 손수건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이 작은 오두막이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였을까.
지한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맡 서랍 아래, 얇은 나무판이 삐걱이는 것을 발견했다. 판을 들어 올리자, 작은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편지 한 통과 작은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목걸이는 그가 수아에게 처음 선물했던, 작은 조약돌 모양의 펜던트였다. 그리고 편지 봉투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지한이에게.”
그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수아의 마지막 흔적.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일 것이다. 지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편지가 과연 그에게 어떤 진실을, 어떤 절망을, 아니면 어떤 마지막 희망을 전해줄 것인가. 숲 속의 적막 속에,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