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고, 폐허가 된 카이론 마을의 지하 저장고는 죽음처럼 차가웠다. 습한 흙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스러져가는 희망의 잔해가 뒤섞인 공기. 강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대앉았다. 낡은 갑옷의 찢어진 천 조각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는 전날 밤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욱신거렸다. 붕대 아래로 스며 나오는 핏자국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그의 턱 끝까지 차오른 절망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밖에서는 둔중한 발굽 소리와 철컥이는 갑옷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제국군이었다. 그들은 사냥개처럼 끈질겼고, 하룻밤의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강루, 괜찮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옆을 향했다. 마리였다. 쉰 목소리였지만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녀는, 젊은 반란군들에게는 어머니이자 굳건한 바위 같은 존재였다. 마리는 낡은 천 조각에 약초를 으깨 바르며 강루의 상처를 들여다봤다. 그녀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괜찮을 리가요. 마리 아주머니. 이대로는… 모두 죽을 겁니다.”
강루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불꽃이 차가운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난 석 달 동안, 그들은 숨 가쁘게 싸우고 도망쳐 왔다. 제국군의 잔혹함은 갈수록 심해졌고, 민초들의 시체는 길가에 널렸다. 정의를 외치며 궐기했던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리며 쓰러졌다. 강루는 그 모든 죽음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오늘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숨 쉬고 있지 않니. 희망은 쉽게 죽지 않는단다.” 마리가 말했다. 그녀의 주름진 눈가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강인함이 서려 있었다.
그때였다. 지하 저장고로 통하는 좁은 통로에서 돌멩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그림자가 다급하게 뛰쳐들어왔다. 도현이었다.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패닉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대장님! 큰일입니다! 제국군이… 마을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지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막고 있습니다! 식량과 물도… 이미 끊겼습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지하 저장고에 메아리쳤다. 그의 말은 차가운 비수가 되어 모두의 심장을 꿰뚫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번졌다. 며칠째 굶주리고 지친 그들은 이제 완벽히 고립된 셈이었다.
“빌어먹을….” 강루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울렸다. ‘이대로는 끝이다.’ 머릿속에서 절망적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의 초췌한 얼굴들이 눈앞을 스쳤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그들 뒤에 남아있는 무고한 민초들도 제국군의 칼날 아래 쓰러질 터였다.
“후퇴는 불가능해. 놈들은 우리가 가진 모든 출구를 막았어.” 마리가 고요하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강루의 눈빛이 흔들렸다. 잊고 있던, 그러나 한때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계획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성공 확률은 극히 낮았고, 수많은 희생을 동반할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나밖에 없어….” 그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강루, 무슨 말을 하려는 거니?” 마리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강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차갑고 단단하게, 강철처럼 번뜩였다.
“놈들이 우리를 사냥개로 본다면… 우리는 놈들의 목줄을 잡아 뜯을 늑대가 되어야지.”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직접 놈들의 심장을 친다.”
순간, 지하 저장고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제국군의 심장?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카이론 마을을 포위한 제국군 총사령관의 막사는 수많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막사 안에는 제국의 긍지라 불리는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 칼리온 경이 버티고 있었다. 그를 암살하겠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다.
“강루, 제정신이야? 칼리온 경은… 제국 최고의 검이자, 수천 명의 기사를 이끄는 자다!” 한 병사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알아.” 강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건 칼리온 경의 머리다. 그 머리를 잘라내면… 놈들의 발은 엉킬 수밖에 없어.”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지치고 두려움에 질린 얼굴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강루를 향한 믿음과 간절한 희망이 엿보였다.
“놈들은 우리가 고립된 쥐라고 생각할 거야. 지하에 숨어 벌벌 떨고 있다고.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어뜯는 법이지.” 강루는 허리춤에서 낡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강철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다. 그 막사에 침투해서 칼리온 경의 목을 따는 것. 그 혼란을 틈타 우리는 이 지옥 같은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
마리가 천천히 강루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은 깊은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이내 결의로 빛났다. “어떤 방법으로? 놈들은 이 지하 저장고 입구까지 완벽하게 봉쇄했을 텐데.”
“이곳은 단순한 저장고가 아니었어.” 강루는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넝쿨에 뒤덮인 낡은 문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카이론 마을의 옛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오래전 비밀 통로로 이어진다고 했어. 옛 왕족들이 비상시에 쓰던 피신처였다고.”
그의 말에 병사들의 눈빛에 희미한 불꽃이 다시 피어났다. 비밀 통로.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이곳을 찾기 위해 죽은 동료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어. 살고 싶다면, 자유를 원한다면… 나와 함께 피를 흘릴 준비를 해라.” 강루의 목소리가 지하 저장고에 울려 퍼졌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하나둘씩 병사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피로와 공포에 질려있던 그들의 얼굴에 서서히 결의가 새겨졌다.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택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좋아. 나는 선봉에 설 테다.” 도현이 칼집에서 녹슨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 대신 새로운 용기가 담겨 있었다.
마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후방을 지원하마. 너희가 길을 뚫으면, 남은 이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강루는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젊은이, 늙은이, 여자, 남자. 모두 지쳤지만, 그들의 눈은 강루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억해라. 우리는 쥐가 아니다. 우리는… 늑대다.”
밤은 더욱 깊어졌다. 제국군의 웅성거림이 점차 가까워지는 가운데, 지하 저장고의 낡은 문이 서서히 열렸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이제 제국의 심장을 향해 걷는 자들의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핏빛 달이 창문도 없는 지하 세계 위에 솟아오르는 듯했다. 이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