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철창살을 붙든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셨다. 거칠게 깎인 돌바닥은 축축하고 미끄러웠다. 이곳에 갇힌 지 벌써 얼마나 되었을까. 햇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은 시간의 흐름마저 멈춰버린 듯했다. 온몸의 신경이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지만, 이제는 닳고 닳아 무뎌질 대로 무뎌진 감각만이 둔탁하게 울렸다.
“이진우…”
갈라진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름만 중얼거렸을 뿐인데, 뇌리에는 수많은 얼굴과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장 선명한 것은, 배신자의 얼굴이었다.
김민준.
그 이름은 혀끝에서 피 맛처럼 맴돌았다. 나의 피, 내가 흘린 땀,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의 피.
나는 한울 그룹의 총수, 대한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거대한 권력의 정점이었다. 신흥 자본 세력의 대표 주자로, 구시대의 낡은 거상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찬사를 받던 사내. 사람들은 나를 ‘천재’, ‘혁명가’라 불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을 형제 삼아, 뜻을 함께하는 자들과 밤낮없이 뛰었다. 그 중에서도 민준은 나의 오른팔이자, 내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믿고 따랐던 나의 분신.
***
“형님, 한울 그룹이 드디어 대한국을 넘어 동방 전체를 장악하는 날이 올 겁니다!”
5년 전, 한울 그룹의 창립 10주년 기념 파티. 수천 명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민준은 흥분으로 빛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잔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순수한 열정과 존경이 가득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그날이 온다면, 그 영광은 내 동생 민준, 너의 공이 가장 클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만큼 그를 믿었고, 그의 능력을 신뢰했다. 그는 나의 그림자였고, 나의 방패였으며, 나의 창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그때는 몰랐다. 그 빛나는 눈동자 속에 감춰진 깊이를. 그 환한 미소 뒤에 숨겨진 차가운 계산을.
***
“형님, 시대가 변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선명했다. 차갑고, 건조하며,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한울 그룹 본사, 옥상 정원에 꾸며진 나의 개인 서재. 내가 손수 가꾼 난초들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그곳에서, 민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커피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 태연히 서서 말했다.
“더 이상 형님의 낡은 방식으로는 이 거대한 그룹을 이끌 수 없습니다. 새로운 비전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등 뒤에 선 경호원들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직접 뽑아 훈련시킨, 나의 가장 충직한 수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이미 낯선 차가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민준아, 대체 무슨 소리냐? 장난이 지나치군.”
피식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리 없었다.
“장난이 아닙니다, 형님.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사회의 3분의 2가 저를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룹의 모든 핵심 요직에는 이미 제 사람이 배치되었구요.”
담담한 어조였다. 마치 오늘 저녁 식사 메뉴를 고르듯, 그는 나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계획을 설명했다. 나의 이름으로 쌓아 올린 신뢰를 어떻게 악용했는지, 나의 약점을 어떻게 파고들었는지, 나의 충복들을 어떻게 매수했는지.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의 심장은 얼음 조각으로 변해갔다.
“형님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거대한 한울을 혼자서 감당하기엔, 이제 너무 지치셨잖습니까.”
그는 빙긋 웃었다. 악마의 미소였다. 나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가장 잔혹한 칼날이었다.
“나는 네게 모든 것을 주었다! 한울은 내가, 내가 세운 제국이다!”
분노가 폭발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나의 손발은 이미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충직한 경호원들이 나를 붙잡았다.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견고했다.
“그렇죠. 형님이 세우셨죠. 하지만 이젠 제가 이끌 겁니다.”
민준은 한 걸음 다가와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형님은 잠시 쉬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편안하게 말이죠. 한울 그룹의 총수 이진우는, 오늘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당분간은… 제가 대행할 겁니다.”
그의 눈은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산산조각 난 나의 자존심, 송두리째 뽑힌 나의 믿음.
그날 밤, 나는 반역죄와 횡령죄라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이 지하 감옥으로 던져졌다. 나의 모든 재산은 몰수당했고, 나의 이름은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
차가운 돌바닥에 기대어 앉았다. 벽에는 내가 손톱으로 긁어 새긴 흔적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나는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나는 죽었다.
한울 그룹의 총수 이진우는 그날 죽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모든 것을 잃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복수심이었다.
김민준. 너는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나의 명예, 나의 재산, 나의 인생.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의 믿음까지.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되갚아 줄 것이다.
지하 감옥의 습한 공기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의 몸은 쇠약해졌지만, 나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다. 이곳에 갇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차단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 갇히기 전, 아주 작은 씨앗 하나를 심어두었다는 것을.
그것은 나의 마지막 보루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민준아… 네가 이 거대한 한울이라는 배를 얼마나 오래 띄울 수 있을지 보자꾸나.”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복수는 차가운 음식이라고들 했다.
나는 가장 차갑고, 가장 잔혹한 음식을 준비할 것이다. 네가 내 식탁 위에 올려놓은 그 음식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으로.
이진우는 죽었다. 하지만 이제, 복수를 위해 태어난 다른 존재가 이 어둠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너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차가운 철창 너머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의 감금 생활이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온 적 없던 침묵의 감옥.
누군가 오는 발소리였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 오랜 침묵이 깨지는 순간, 나의 복수의 서막이 시작될 참이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긴장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드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