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메아리
리안의 손에 쥐어진 ‘시간의 파편’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미약한 진동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느껴졌다. 낡은 창고의 거친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녀는 작은 휴대용 스캐너로 파편을 분석하고 있었다. 찌그러진 금속 테이블 위에는 지아가 급히 연결한 여러 장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바깥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부터 찢어지는 비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루스의 추격대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젠장, 리안! 이건 오래 못 버텨. 보안 시스템이 계속 뚫리고 있어. 다음 번엔 우리 위치를 정확히 짚어낼 거야!” 지아가 손가락으로 홀로그램 지도를 빠르게 훑으며 초조하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리안은 대답 대신 스캐너 화면에 집중했다. 파편은 마치 잠겨 있는 거대한 문처럼 보였다. 겹겹의 암호와 시간의 잔해가 그것을 봉인하고 있었다. “거의 다 됐어… 뭔가 반응이 오고 있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캐너 화면이 갑자기 일렁이며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이내, 찢어지는 듯한 정전기 노이즈와 함께 한 줄기 영상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과거의 잔해였다.
되살아나는 파편
영상은 혼란스러웠다.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공간. 수많은 데이터 스크린이 번뜩이고,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녀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강인함. 리안은 순간 자신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내 모습인가?”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파편 속의 여인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상은 다시 격렬한 노이즈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리안은 자신의 눈과 같은 색깔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기억해… 잊지 마…’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분명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너무도 아득하고 슬프게 울렸다.
“리안? 무슨 일이야? 얼굴이 창백해졌어!” 지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가왔다.
리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본 것은 단순히 과거의 영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영혼에 새겨진 각인처럼, 깊은 울림을 남겼다. 잊고 있던 감정의 물결이 그녀를 덮쳤다. 사랑, 상실, 그리고 거대한 죄책감. 왜? 무엇 때문에?
그때, 창고의 육중한 철문이 쿵, 하고 거칠게 울렸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한 충격이었다.
“젠장! 놈들이 문을 부수고 있어! 5분, 아니 3분 안에 돌파할 거야!” 지아가 이를 악물었다.
선택의 기로
리안은 파편을 움켜쥐었다. 짧은 영상에서 느낀 감정의 파도는 그녀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자신에게 깊은 슬픔과 죄책감을 남긴 과거의 그녀는 대체 누구였을까? 그리고 무엇을 잊지 말라고 했던 걸까?
“지아, 이 파편… 이걸 계속 분석해야 해. 내 기억의 핵심이 여기 있는 것 같아.” 리안이 결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여기선 안 돼! 도망쳐야 해, 리안! 지금 당장!” 지아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이미 탈출 경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아니… 더는 도망칠 수 없어.’ 리안은 생각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도망쳐왔다. 기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도, 실체 없는 위협에 쫓기며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방금 본 파편은 그녀에게 과거를 직시할 용기를 주었다. 슬픔이든, 죄책감이든, 그녀의 일부였다.
“카이루스가 이걸 노리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이 안에 있는 정보가 그에게도 중요한 거지.” 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놈이 여기까지 온다면, 이 파편을 얻을 수 없을 거야.”
지아는 리안의 표정에서 결의를 읽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겠지만… 이건 너무 위험해. 카이루스는 혼자 오지 않을 거야. 최소한 열 명 이상의 전투 인력이 투입될 거라고.”
“그럼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해.” 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고 복잡한 창고 내부에는 숨을 만한 곳도, 방어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천장의 거대한 환풍구 통로에 닿았다.
사라지는 잔향
‘시간의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리안은 파편을 손에 쥐고 창고 안쪽에 위치한 무너져가는 기계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다. 지아는 창고의 전력 시스템을 해킹하여 내부의 모든 조명을 꺼버렸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콰아앙! 철문이 마침내 부서지는 굉음이 울렸다. 중무장한 병사들의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들의 헬멧에 달린 적외선 센서가 창고 내부를 훑는 희미한 붉은 빛을 내뿜었다.
“리안! 놈들이 들어왔어! 숨어!” 지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리안은 숨을 죽인 채 파편을 응시했다. 푸른빛은 이제 희미하게 깜빡이며 그녀의 손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과거의 조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 모를 얼굴들, 웃음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다정한 말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기억에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아직 해방되지 못한 채 파편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잊지 마… 잊지 마…’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슬픔은 이제 절규로 변해 있었다.
그때, 파편이 갑자기 뜨거워지더니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파편은 산산조각이 나며 강렬한 섬광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리안은 얼어붙었다. 그녀의 유일한 단서, 그녀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절망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파편이 사라진 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리안! 이쪽이야! 어서!” 지아가 손목에 찬 통신기로 다급하게 외쳤다. 지아는 이미 천장의 환풍구 통로로 몸을 던진 후였다.
리안은 허탈감에 휩싸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기억의 파편이 남긴 것은 거대한 상실감과 함께, 이름 모를 슬픔의 잔향뿐이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잊혀진 과거가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부서진 철문 사이로, 차가운 달빛이 창고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리안은 그 달빛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상실감의 무게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기억은 파편처럼 흩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씨앗은 이미 그녀의 심장에 깊이 박혀 있었다.
‘다시 찾을 거야. 무엇이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절망을 넘어선 희미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지아가 사라진 환풍구 통로를 올려다보며, 리안은 다음 움직임을 준비했다.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