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산은 한숨을 쉬며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텁텁한 입안에 맥주 한 모금을 털어 넣자, 비로소 고단했던 하루의 찌꺼기들이 조금이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24층 고층 아파트, 뻥 뚫린 창밖으로는 희미한 도심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서울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하면서도 요란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아파트, 2405호만큼은 고요했다. 태산은 그 고요함이 좋았다.
그때였다. 툭.
아주 작고 건조한 소리였다. 마치 손가락으로 유리컵을 가볍게 튕기는 듯한. 태산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식탁 위에 놓인 빈 맥주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피곤한가.’
태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TV에 시선을 돌렸다. 요즘 들어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평화로운 일상에 적응한 지 십 년. 강호의 피바람을 등지고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걸은 지 언 십 년 만에 찾아온 이런 미묘한 감각은, 그저 기우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정을 넘어서자 아파트 전체가 잠잠해졌다. 태산은 서재로 향했다. 책상에 앉아 붓을 들었다. 텅 빈 화선지 위로 먹물이 번져 나가는 동안, 그의 마음속 번잡함도 서서히 가라앉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오롯이 붓질에만 집중하던 그때.
끼이익… 콰앙!
바로 옆 침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태산의 붓 끝에서 먹물이 튀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잠그고 나왔을 터였다. 바람? 이 높은 층에서? 그것도 이렇게 문을 날려버릴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태산은 애써 무시했다.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문은 활짝 열린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의 이불이 마치 누군가 격렬하게 뒤척인 것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아침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던 그대로가 아니었다.
태산은 침대 끝에 놓인 베개를 응시했다. 베개는… 마치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가 놓은 것처럼 깊게 패어 있었다. 분명히.
그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사라지고, 굳건한 평정심이 자리 잡았다.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강호에서 수많은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마다 발현되던 그 특유의 냉철함이었다.
“누구냐.”
나지막이 읊조린 목소리는 적막한 침실에 가늘게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침대 밑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어 나오는 듯한 기분 나쁜 싸늘함이 그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태산은 몸을 웅크린 채 그 냉기를 따라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짙은 그림자만이 존재할 뿐.
그 순간, 거실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태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박차고 나왔다. 거실의 작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오래된 도자기 화병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태산이 아끼던 것이었다.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유일하게 남겨주신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발끝으로 부서진 도자기 파편을 건드리자, 묘한 기운이 손끝으로 타고 올라왔다. 일반적인 차가움이 아니었다. 살기(殺氣)였다.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악의(惡意)가 깃들어 있었다.
이건 도둑의 소행이 아니다. 귀신의 장난도 아니다.
이것은, 공격이었다.
“젠장.”
태산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십 년간 잊고 살았던 감각이 마치 용암처럼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온몸의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활성화되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 녹슬지 않았구나.’
그때였다. 주방 싱크대 위의 접시들이 일제히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격렬하게 흔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내, 접시 중 하나가 휙 하고 날아올라 태산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파삭!
태산은 미동도 없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접시는 그의 귀 옆을 스쳐 지나가 벽에 부딪혀 깨졌다. 조각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꽤나 성질이 급한 놈이로군.”
태산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평온함 속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피어났다. 그는 두려워하는 대신, 마치 오랜만에 강적을 만난 무인처럼 피어나는 흥미를 느꼈다. 이 기운은 확실했다. 무형의 기운.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일반인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태산에게는 달랐다.
그의 기혈은 이미 완벽하게 열려 있었다.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오감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탁한 기운의 흐름, 그 안에 담긴 희미한 원념(怨念)의 파동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어디, 네 놈의 정체를 드러내라.”
태산은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정확했다. 침묵 속에 움직이는 그의 존재는 마치 사냥감을 쫓는 맹수와 같았다. 아파트의 정적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먹이를 앞에 둔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긴장감이었다.
그리고 그 긴장감 속에서, 태산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형상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허공이 일렁였다. 공기 중의 습기가 응축되는 것처럼, 주방 한가운데에 희미하고 투명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잔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왜곡이었다.
그 왜곡 속에서, 어두운 눈동자 두 개가 태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태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차가웠지만, 동시에 섬뜩할 정도의 자신감이 깃든 미소였다.
“찾았다.”
그의 손이 스치듯 허공을 갈랐다.
고요했던 아파트에, 드디어 강호의 기운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이제 막 시작된 싸움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