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시장의 그림자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폐 속으로 들이마시는 공기는 미세한 잿가루와 금속 비린내로 가득 차, 목구멍을 사포로 긁는 듯 따가웠다. 왼쪽 팔뚝을 감싼 천 조각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며칠 전 잔해를 뒤지다 날카로운 철근에 스쳤던 상처는 예상보다 깊었고, 붉은 열기와 함께 고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덧난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사소한 상처는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과 같았다. 항생제가 절실했다.
지훈은 낡은 방독면 안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건물들의 실루엣이 거대한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한때 번화했을 거리는 이제 뒤틀린 철근과 깨진 콘크리트 조각, 그리고 이름 모를 먼지로 뒤덮인 황량한 사막이 되었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겼는지, 그의 낡은 전투화가 내딛는 발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목표는 과거 ‘약국’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구글 맵 같은 건 진작에 먹통이 된 지 오래. 기억에 의존해, 혹은 그저 감으로 거대한 폐허 속에서 작은 점을 찾아야 했다. 며칠을 헤매다 겨우 발견한, 반쯤 무너진 상가 건물은 희망처럼 보였다. 낡은 간판의 글자 몇 개가 떨어져 나가고 희미하게 ‘드럭스토어’라는 단어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제발… 제발.”
혼잣말이 방독면 안에서 작게 울렸다. 굳게 닫힌 철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굉음과 함께 문이 안쪽으로 밀려났다. 내부는 어두웠다. 빛이 들어올 창문은 깨져 있었고, 선반들은 먼지에 뒤덮인 채 텅 비어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약탈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지훈은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완전히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이런 곳일수록, 절망적인 환경일수록 사람들은 쉽게 눈에 띄는 것만 가져가고 지나치기 마련이었다. 작은 틈새, 가구 뒤편, 혹은 바닥의 깨진 틈 사이. 그런 곳에 희미한 희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낡은 손전등을 켰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르고 벽면을 쓸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오른손은 언제나 허리춤의 칼자루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약품 냄새가 진동했을 공간은 이제 곰팡이와 쇠 녹슨 냄새, 그리고 이끼 냄새가 섞여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텅 빈 진열장들을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카운터 너머, 창고였을 법한 공간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기대감이 불안감과 뒤섞였다. 누군가 이미 다녀갔다면? 아니, 아직 남아있다면?
숨을 죽이고 창고 문틈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흙먼지와 잔해 속에서 낡은 서랍장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텅 비었거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찢어진 포장지들뿐이었다. 여섯 번째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달그락.*
서랍 안쪽, 겹겹이 쌓인 서류 뭉치 아래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 꺼내보니 작은 플라스틱 약병이었다. 빛바랜 라벨에는 뭉개진 글씨로 ‘항생제’라고 적혀 있었다. 유통기한은… 젠장, 한참 지났지만, 이 세상에서는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지훈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것을 느꼈다. 기적이었다.
그때였다.
*스스슥….*
아주 미세한 소리. 마치 바닥을 기어가는 뱀의 비늘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 질척이는 것이 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훈은 순간 몸을 굳혔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의 심장 박동만이 귓가에 울렸다. 그는 약병을 황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고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소리는 창고 문 쪽에서 들려왔다. 벽면에 비친 손전등 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 그림자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크르르릉…**
낮고 굵은 으르렁거림이 건물 전체를 흔드는 듯했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비정한, 짐승의 소리였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손전등 불빛은 껐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창고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 건물은 이미 무너지고 파편화되어 있었다. 어디서든 짐승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이 소리는… 그가 이전에도 몇 번 마주쳤던, 변이된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몸집은 거대하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무엇보다 인간의 살점을 탐하는 놈들.
발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몸이 끌리는 듯한 소리,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소리. 놈은 창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훈은 칼자루를 꽉 쥐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맞서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출구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창고는 한쪽 벽면이 외벽과 맞닿아 있었고, 작은 환풍구 같은 것이 뚫려 있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에어컨 실외기가 연결되어 있었던 자리일 터였다. 녹슨 철근이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훈련했던 그의 몸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쿵… 쿵…*
짐승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놈은 냄새로 지훈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숨 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웠다. 지훈은 환풍구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잔해들이 작은 소리를 냈다.
**콰아앙!**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놈은 지훈이 숨어있던 벽 뒤편을 향해 돌진했고, 벽의 일부가 부서지며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지훈은 가까스로 몸을 날려 피했다. 놈의 찢어진 입에서는 썩어가는 고기 냄새와 함께 뜨거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몸집에, 털은 마치 돌가루를 뒤집어쓴 듯 딱딱해 보였다. 눈은 퇴화했는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신 콧구멍은 크게 벌어져 킁킁거리며 그의 냄새를 쫓고 있었다.
*이빨… 저 이빨에 물리면 끝장이다.*
지훈은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일으켜 환풍구로 향했다. 놈은 그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지훈은 절박하게 몸을 날려 환풍구 입구로 파고들었다. 몸의 절반이 겨우 들어갔을 때, 놈의 거대한 앞발이 그의 발목을 스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지를 찢고 피부를 긁었다. 쓰라린 통증이 전신을 꿰뚫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밀어 넣었다.
*덜컹! 덜컹!*
놈은 환풍구를 통해 빠져나가려는 지훈을 향해 끈질기게 발톱을 뻗었다. 쇠로 된 환풍구 틀이 요동쳤다. 지훈은 겨우 환풍구 밖으로 몸을 던졌다. 낡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며 팔꿈치를 찧었지만, 아픔을 느낄 틈도 없었다. 놈의 울음소리가 뒤에서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놈은 환풍구를 부수려는지, 계속해서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휘감았다.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잿빛 시장의 골목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어둠이 짙어지는 폐허는 온통 적으로 가득 찬 미궁과 같았다.
한참을 달려 겨우 멈춰 섰을 때, 그의 몸은 땀으로 흥건했고, 팔뚝의 상처는 다시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발목은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무사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항생제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보았다.
멀지 않은 곳,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연기 한 줄기.
아주 작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하지만 분명히, **불의 연기였다.**
이 폐허에서, 자연적인 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번개라도 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먼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피운 불이라는 증거였다.
다른 생존자가 있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
지훈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안도감보다는 날카로운 경계심이 먼저 찾아왔다. 다른 사람. 그건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희망이 될 수도 있었지만,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짐승보다 더 잔인할 수 있었다.
밤은 빠르게 찾아왔고, 잿빛 하늘은 짙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지훈은 연기가 피어오른 곳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희미한 불빛은 마치 손짓하는 유령 같았다.
다가가야 하는가, 아니면 피해야 하는가.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심장은 이미 놈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새로운 위협, 혹은 새로운 희망을 향해.
오늘 밤, 잿빛 시장의 그림자 속에서 그의 고독한 여정은 또 다른 갈림길에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