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7화: 붉은 별의 맹세, 푸른 심장의 균열
[삐빅- 삐빅-]
경고음이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류진은 망막에 번개처럼 번쩍이는 붉은 표식들을 애써 무시하며 조종간을 틀었다. 거대한 강철의 팔이 짓뭉개진 채 추락하는 동료 기체의 잔해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거대 병기 ‘여명’의 육중한 몸체가 회전하며 쏟아지는 레이저 포화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조종석 밖은 지옥이었다. 암흑 같은 우주 공간을 찢고 번져나가는 섬광, 폭발음, 그리고 끝없이 들려오는 아군과 적군의 단말마.
“젠장, 놈들이 너무 많아! 지원은 언제 오는 겁니까!”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전기에 소리쳤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이 망할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인류는 끝없이 밀려드는 ‘키메라’ 군단의 파상 공세에 행성계를 하나씩 내주고 있었다. 그들은 진화했다는 명목 아래 인류를 멸종시키려 들었고, 인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적’임을 맹세하는 전쟁이었다.
“류진 소위! 측면 엄호! 저 보병 기체들을 처리해!”
사령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류진의 뇌리를 꿰뚫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여명은 거대한 어깨에 장착된 개틀링 포를 전개했다. 철컥이는 금속음과 함께 작열하는 화염이 어둠을 밝혔다. 수십 대의 키메라 경량 보병 기체들이 벌레 떼처럼 산산조각 났다. 조종석의 진동이 온몸을 울렸지만, 류진은 감각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전장의 흐름을 쫓고 있었다.
그때였다. 류진의 시야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 기체가 포착되었다. 다른 키메라 기체들과는 확연히 다른, 유려하면서도 기민한 실루엣. 검은색 기체 외곽을 따라 흐르는 푸른빛 에너지 라인. 마치 깊은 밤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밤그림자.’
뇌리가 얼어붙었다. 류진의 손이 순간적으로 조종간 위에서 굳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 전장에서, 이 혼돈 속에서, 설마.
그 순간, 그의 내부 통신망에 알 수 없는 주파수가 끼어들었다. 암호화된 통신. 마치 심장박동처럼 미약하게 울리는 낮은 진동음. 오직 그와 그녀만이 아는, 비밀의 통로.
[……류진.]
차가운 금속음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 메마르고, 건조하지만, 그 어떤 다정한 속삭임보다도 류진의 영혼을 흔들었다. 아이라였다. 그 ‘밤그림자’의 조종석에 앉아 있을 그녀의 목소리였다.
류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바로 그의 전방에, 여명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전투력을 자랑하는 키메라의 최정예 기체, 밤그림자가 유유히 떠 있었다. 그 기체의 조종석에 앉은 아이라가,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적진 한복판에서.
“아이라…!”
류진은 속삭였다. 그의 무전기는 이미 사령부의 지시와 동료들의 절규로 아수라장이었지만, 그 모든 소음은 아이라의 목소리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조심해. 뒤쪽… 강습함이.]
아이라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류진의 센서에 붉은 점이 깜빡였다. 거대한 키메라 강습함이 후방에서 전장을 가로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여명은 곧바로 포위당할 터였다.
류진은 본능적으로 조종간을 당겼다. 여명의 부스터가 작렬하며 거대한 기체가 급격히 상승했다. 강습함에서 발사된 거대한 에너지탄이 여명이 있던 자리를 불태웠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류진 소위! 정신 차려! 전방에 키메라 에이스 기체다! ‘밤그림자’다! 전설적인 파일럿, 그 악마를 놓치지 마!”
동료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악마’. 그들이 아이라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류진의 눈앞에서 밤그림자가 회피 기동을 시작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여명의 사정권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아이라는 그를 향해 도발하듯, 혹은 이끌 듯 움직였다.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적과 적의 경계선에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면서도, 결코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지금은…’.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자신의 분대원들이 주위에 있었다. 사령부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여기서 아이라와 교전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것이 무너질 터였다.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처단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밤그림자. 그녀의 모습은 전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령 같았다.
[……도망쳐, 류진.]
다시 한번, 아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강렬하게, 다급하게.
[그들의 함정이 깊어.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그 순간, 류진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밤그림자가 갑자기 옆구리에 에너지탄을 맞고 휘청거렸다. 키메라 기체들 중 하나가 오발한 것이었다. 아니, 오발이 아니었다. 밤그림자를 향해 공격을 가한 것은, 분명 키메라 소속의 다른 기체였다.
‘…아이라도 위험해.’
그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키메라 내부에서도 아이라는 이단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전투 방식, 그리고 가끔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망설임 때문에. 그들은 아이라를 의심하고 있었다. 인간과의 접촉, 금지된 관계.
류진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그녀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들은 단 한 번도 서로에게 치명타를 입힌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암묵적인 맹세였다.
“류진 소위! 대체 뭘 하는 겁니까! 저 악마를 쓰러뜨릴 기회입니다!”
분대장의 고함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류진은 상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여명의 부스터를 최대 출력으로 올렸다. 밤그림자가 흔들리는 곳으로, 적진 깊숙한 곳으로, 거대한 강철의 기체가 맹렬하게 돌진했다.
“젠장! 류진! 거기 함정이라고!”
뒤에서 동료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하지만 류진은 멈추지 않았다. 푸른 섬광을 내뿜는 밤그림자가 위태롭게 떠 있는 곳으로, 오직 그곳으로 향했다. 마치 붉은 별의 심장을 향해 뛰어드는 푸른 심장처럼.
그가 밤그림자에 가까워졌을 때, 아이라의 음성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격렬하고, 절박하게.
[류진! 안 돼! 여기 오지 마! 내가… 내가 너를!]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밤그림자의 센서에서 마지막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그 순간, 키메라 강습함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에너지 빔이 밤그림자를 정확히 관통했다.
“아이라!!!”
류진의 절규가 우주 공간을 찢었다. 밤그림자의 동력로가 폭발하며 푸른빛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류진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라의 마지막 경고이자, 마지막 희생이었다는 것을. 자신을 살리기 위한.
그때, 여명의 센서에 무수한 붉은 점들이 나타났다. 강습함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수백 대의 키메라 기체들이 일제히 류진을 향해 포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라의 함정에, 정확히는 그녀가 경고했던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낳은 비극의 끝은, 결국 이 피로 물든 전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붉은 별과 푸른 심장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눌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류진은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라. 네가 내게 남긴 맹세, 내가 끝내주지.”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여명의 모든 무장이 전개되고, 에너지가 끓어올랐다. 거대한 강철의 기체가 마치 분노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수많은 키메라 기체들을 향해 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 속 푸른 균열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핏빛 분노로 물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