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김현우는 서울 변두리, 낡은 오피스텔의 7층에 살았다. 햇살조차 왠지 지쳐 보이는 오후, 그는 눅눅한 공기 속에서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34제곱미터짜리 원룸은 늘 그랬듯 고요했다. 간혹 옆집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음악 소리나 위층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이 적막을 깨트릴 뿐이었다. 그의 삶도 딱 그 정도였다. 별다른 파동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 같았지만, 가끔은 너무 잔잔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암.”

작은 하품을 토해내며 현우는 식탁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리모컨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컵라면 옆에 두었었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침대 위에도, 책상 위에도, 심지어는 바닥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내가 헛봤나?’

그는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주방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툭’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리모컨이 식탁 한가운데, 방금 전까지 있었던 그 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뭐야…”

현우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싶었지만, 이상했다. 그는 리모컨을 집어 들며 찜찜한 기분을 애써 떨쳐냈다. 그저 피곤해서 착각한 것이라고,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현우는 습관처럼 침대 옆 협탁에 안경을 벗어두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그의 안경은 침대 발치, 카펫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아, 또 잠버릇인가…”

그는 원래 잠버릇이 심한 편이었다. 이불을 걷어차는 건 예사였고, 가끔은 잠결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기도 했다. 아마 자면서 안경을 던져버린 것이리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안경을 주워 쓰고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일’들은 점점 빈번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분명히 잠가두었던 욕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현우는 현관문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굳게 잠겨 있었다.
어느 날은 거실에 두었던 책 한 권이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고, 또 다른 날은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려 음료수 병들이 김을 빼고 있었다.
밤에는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하고 가구가 끌리는 소리, “짤그랑” 하고 주방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 처음에는 옆집 소음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밤 12시가 넘은 시각, 모든 집이 잠들었을 법한 시간에 들려오는 그 소리들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젠장, 옆집 이사라도 오나?”

현우는 신경질적으로 벽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벽 너머는 고요했다. 잠시 후, 그의 집 안에서 다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주방이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은 닫혀 있었고, 식기들도 제자리에 있었다. 그때,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컵 하나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현우는 숨을 헙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잠버릇도, 옆집 소음도 아니었다.
그는 얼어붙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차갑고 낯선 시선이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구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적막만이 그의 목소리를 되돌려줄 뿐이었다. 그는 급히 스마트폰을 들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증거라도 남겨야 했다.

그 후로 일주일은 지옥 같았다. 현우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물건이 던져지는 건 예사였고, 가끔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던 액자들이 뚝뚝 떨어져 깨졌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은 거꾸로 뒤집혀 있었고, 현관문은 분명 잠갔는데 새벽에 보면 살짝 열려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름 끼치는 것은, 가끔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 아른거리는 그림자였다. 사람의 형상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모호한 검은 형상. 그가 고개를 돌려 똑바로 보려 하면, 언제나 사라져 있었다.

“이 빌어먹을… 나가라고! 당장 나가!”

현우는 밤새도록 잠을 설치다 못해, 이젠 아예 대놓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CCTV를 설치했지만, 녹화된 화면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오직 물건이 스스로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장면만이 흐릿하게 담길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현우는 침대에 앉아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정면의 벽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야가 흐려진 탓인가 싶었다. 하지만 곧, 벽의 페인트칠이 물처럼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벽지가 젖어들어 색이 변하더니, 이내 벽 자체가 투명해지는 듯했다.
현우는 숨을 멈췄다. 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이었다.
그것은 도심의 아파트 단지도, 회색빛 콘크리트 숲도 아니었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하늘 아래, 기묘한 형태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줄기는 금속처럼 빛났고, 나뭇잎은 수정처럼 반짝였다. 공중에는 거대한 해파리처럼 생긴 생명체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고, 땅 위로는 거대한 뿔을 가진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야…?”

현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그의 아파트 벽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그때, 투명해진 벽 사이로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그의 몸을 휘감았고, 마치 손가락처럼 그의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휘몰아치자, 아파트 내부의 모든 물건들이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식탁 의자, 텔레비전, 심지어 침대까지. 중력을 잃은 듯 둥둥 떠다녔다. 현우 역시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안 돼…!”

그는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눈앞의 풍경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그의 아파트 벽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는 사방이 기묘한 숲으로 둘러싸인 공간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살던 아파트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몸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추락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대신, 묘한 해방감과 함께 심장이 새로운 기대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차갑고 축축했던 바람은 온몸을 감싸는 따스한 기운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시야는 넓어지고, 감각은 예민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언어의 속삭임, 숲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신비로운 향기, 그리고 피부에 와닿는 낯선 공기의 감촉.
그는 깨달았다. 이곳은, 그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그저 김현우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졌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하늘을 가로지르는, 찬란하게 빛나는 별똥별의 꼬리였다. 그것은 마치 그를 환영하는 듯, 길고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새로운 세상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김현우의 모든 감각이 새로운 세상의 파동과 동화되면서, 그의 존재는 아파트의 흔적과 함께, 완벽하게 ‘전생’했다.
그는 알 수 없는 세계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모하며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