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한유진은 테이블 위로 늘어뜨려진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흐느꼈다. 콧물과 눈물로 범벅된 얼굴 위로, 마르다 만 짜장면 면발이 불어터진 인생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인생은, 그녀가 디자인한 스마트 홈 인터페이스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매끄럽고 완벽한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였다.

“내… 내 아리아드네…”

유진은 엉망이 된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를 흘렸다. ‘아리아드네의 실’은 그녀가 2년 동안 피땀 흘려 개발한 프로젝트였다. 단순한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사용자의 감정까지 읽어내는 듯한 섬세한 반응, 미려한 그래픽,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만이 구현할 수 있는 숨겨진 ‘미로 탈출’ 이스터 에그까지.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영혼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영혼을 산산조각 낸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친구이자 동료, 강세아였다.

프레젠테이션 이틀 전. 유진은 최종 파일 백업을 세아에게 부탁했다. 세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걱정 마, 유진아. 내가 완벽하게 백업해둘게! 넌 그동안 컨디션 조절이나 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백업한 것은 유진의 성공이 아닌, 유진의 절망이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 유진이 준비한 파일은 깨져 있었고, 대신 세아가 완벽하게 ‘복붙’한 유진의 디자인이 그녀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유진은 회사에서 ‘실패작을 제출하고 변명하는 무책임한 디자이너’로 낙인찍혔고, 결국 해고당했다. 반면, 강세아는 ‘아리아드네의 실’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새로운 시작!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요!’ 따위의 해시태그가 달린 명품 사진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유진은 화면 속 해맑게 웃는 세아의 얼굴을 노려봤다. 짜장면 그릇이 옆으로 쓰러지며 남은 면발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더 이상 슬퍼할 기운도 없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복수해야 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러나 유진답게,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그래. 복수할 거야. 나 한유진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거야, 강세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물 자국 위로 단단한 결심이 새겨졌다. 물론 당장은 갈 곳도, 돈도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천재적인 재능과, 강세아를 향한 불타는 복수심이 있었다.

***

두 달 후, 유진은 강세아가 몸담고 있는 거대 IT 기업 ‘미노스 테크’에 다시 발을 들였다. 그것도 가장 하찮은 인턴으로. 복수를 위해서는 적진 깊숙이 침투해야 했다. 그녀의 목표는, 강세아가 자신의 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파고들어,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아리아드네의 실’이 사실은 모조품임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한유진 인턴, 복사 좀 부탁해요. 이 서류는 전부 A팀 회의실로 가져다주고, 저건 C팀에 전달하고… 아, 그리고 커피는 뜨겁게!”

그녀의 사수는 콧대 높은 김 대리였다. 유진은 김 대리의 지시를 묵묵히 따랐다. 인턴의 삶은 고단했다. 하지만 매일 회사 게시판에 강세아의 이름으로 올라오는 ‘아리아드네의 실’ 관련 기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강세아 수석 디자이너, 천재적인 아이디어!’ ‘미노스 테크의 새로운 얼굴, 강세아!’

이쯤 되니 세아가 그녀의 디자인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유진의 ‘아리아드네의 실’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사용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해 미묘하게 인터페이스 색상을 바꾸거나, 심지어 고유한 리듬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세아가 과연 그 깊은 층위까지 이해했을까?

어느 날, 유진은 복사기를 돌리다 우연히 중요한 서류를 발견했다. ‘아리아드네의 실’의 차기 업데이트 회의 자료였다. 무심코 내용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이게… 무슨…”

업데이트 내용 중에는 유진이 의도적으로 숨겨둔 ‘미로 탈출’ 이스터 에그의 핵심 알고리즘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세아가 디자인을 훔쳤지만, 그 안에 숨겨진 진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이건 완벽한 약점이었다.

그때였다. “거기, 복사기 앞에서 뭐 합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저음의 목소리에 유진은 화들짝 놀라 서류를 품에 숨겼다. 고개를 돌리자,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미노스 테크의 신임 본부장, 이도윤. 그는 차갑고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실’ 프로젝트에 새로 투입되어 모든 것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 서류가 떨어져서…” 유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든 복사지를 흔들었다.

도윤은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를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기밀 서류입니다. 함부로 보지 마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첫 만남부터 찍혔다.

그러나 도윤의 눈빛은 그녀의 얼굴보다는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 정확히는 서류 봉투에 적힌 ‘아리아드네의 실’이라는 글자에 더 오래 머물렀다.

***

유진은 도윤을 피하며 강세아의 약점을 캐는 데 집중했다. 그녀는 세아가 ‘아리아드네의 실’의 핵심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특히, 사용자 감정에 따른 인터페이스 변화 알고리즘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냈다. 세아는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발표했지만, 실제 구현에서는 미묘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었다.

유진은 복수 계획을 세웠다. 큰 회의가 열리는 날, ‘아리아드네의 실’ 시연 중에 그녀가 만든 이스터 에그를 역으로 이용해 세아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 하지만 인턴인 그녀에게는 회의실 접근조차 어려웠다.

그때마다 자꾸 이도윤 본부장과 부딪혔다. 복사기 앞에서, 탕비실에서, 심지어는 회사 식당에서까지.

“한유진 인턴, 또 거기 있습니까? 내 눈을 피해 어딘가 숨어 있는 줄 알았는데.” 도윤은 그녀를 볼 때마다 비꼬는 듯한 말을 던졌다.

“본부장님, 제가 딱히 본부장님을 피할 이유는 없는데요.” 유진도 지지 않고 맞섰다.

“흐음. 아닌 척하지만, 묘하게 수상합니다. 당신.”

어느 날 저녁, 유진은 몰래 서버실 근처를 서성였다. 세아의 디자인 파일에 접근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거기서 뭐 합니까?” 또 이도윤이었다. 그는 마치 그녀의 뒤를 밟는 것 같았다.

“아, 본부장님! 저는… 길을 잃어서… 어두워서 잘 안 보여서… 이쪽이 화장실인 줄 알았습니다!” 유진은 횡설수설했다.

도윤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여기가 화장실처럼 보입니까? IT 기업 서버실이?”

유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게… 급해서…!”

도윤은 한숨을 쉬더니 불쑥 물었다. “당신… ‘아리아드네의 실’에 대해 뭘 알고 있습니까?”

유진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어떻게?

“왜… 그런 걸 물으시죠?” 그녀는 애써 침착한 척했다.

“당신은 인턴치고는 ‘아리아드네의 실’ 관련 서류에 비정상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김 대리가 준 복사물까지 몰래 복사하더군요.” 도윤의 눈은 예리했다. “게다가… 당신은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지.”

유진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어쩌면…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이도윤은 강세아의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세아의 성과에 대해 미묘한 의심을 품고 있는 듯했다.

“본부장님… 제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유진은 결심했다. “저, 사실… ‘아리아드네의 실’은 제가 만든 겁니다.”

도윤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놀라움, 그리고 이해.

유진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세아에게 배신당한 일, 회사에서 해고당한 일, 그리고 복수를 위해 인턴으로 잠입한 것까지.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두운 서버실 통로에서, 유진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이야기가 끝나자 도윤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의 ‘미로 탈출’ 이스터 에그는… 강세아 수석이 설명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군요.”

유진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셨죠?”

“내게 보고된 자료에는 ‘미로 탈출’이 단순한 부가 기능으로 되어 있었지만, 나는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인 디자인 맥락에서 너무 튀었으니까. 당신의 설명은… 모든 퍼즐을 맞춰주는군요.” 도윤은 차가운 눈빛 속에 미묘한 흥미를 드러냈다. “흥미롭습니다. 자, 한유진 인턴. 그럼 당신의 복수를 도와드리죠.”

***

다음 주, 미노스 테크의 신제품 발표회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강세아는 ‘아리아드네의 실’의 성공에 도취되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섰다. 그녀의 옆에는 이도윤 본부장이 서 있었다.

“이도윤 본부장님, 다음은 ‘아리아드네의 실’의 핵심 기능인 사용자 감정 인식 인터페이스 시연이 있겠습니다.” 사회자가 말했다.

강세아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시연을 시작했다. 관객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유진은 무대 뒤편에서, 이도윤이 준 무선 이어폰을 낀 채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강세아 수석 디자이너, 시연 중에 ‘아리아드네의 실’ 안에 숨겨진 흥미로운 기능을 하나 더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윤이 갑자기 물었다.

세아의 얼굴에 미묘한 경련이 스쳤다. “아, 물론이죠. 본부장님. 하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에만…”

“괜찮습니다.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에 이스터 에그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리아드네의 본래 의도에 어긋날 겁니다.” 도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은 무대 뒤 유진을 향했다.

유진은 도윤의 신호에 맞춰 노트북을 조작했다. 그녀가 코드를 입력하자,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 시연되던 ‘아리아드네의 실’ 인터페이스가 갑자기 미묘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화면 중앙에 작은 미로 형상이 나타났다.

“이게… 뭐죠?” 사회자가 당황했다.

세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저, 저건… 개발 중인 기능이라 아직 미완성입니다!”

“미완성이라기엔 너무 완벽해 보이는데요.” 도윤이 말했다. “이 미로, 강세아 수석 디자이너의 고유한 디자인 시그니처인가요?”

그는 세아를 직시했다. 세아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 유진의 목소리가 도윤의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본부장님, 말씀하세요. 이 미로는… 오직 제 마음이 담긴 암호로만 풀 수 있는 ‘미로 탈출’ 이스터 에그라고요.”

도윤은 미소를 지었다. “이 미로는… 사실 사용자의 고유한 심리 패턴을 입력하면 탈출구가 열리는 특별한 ‘미로 탈출’ 이스터 에그입니다. 개발자가 아닌 이상, 아무나 풀 수 없죠.”

세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럴 리가… 그건 제가 개발한…!”

“그럼 강세아 수석 디자이너가 직접 시연해주시죠. 당신의 심리 패턴을 입력해서, 이 미로를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당신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직접 보고 싶습니다.” 도윤은 친절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세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 기능의 존재 자체는 알았지만, 그 핵심 원리와 작동 방식은 전혀 몰랐다. ‘미로 탈출’은 유진의 깊은 감정과 기억을 코드로 담아낸, 그녀만의 시그니처였으니까.

객석에서는 웅성거림이 커졌다. 세아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때, 도윤은 무대 뒤편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유진은 용기를 내어 무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눈은 강세아를 향했다.

“강세아 씨, 제가 보여드리죠. ‘아리아드네의 실’의 진짜 개발자가 누구인지.”

유진은 세아 옆에 섰다. 그녀의 손이 능숙하게 터치스크린 위를 움직였다. 미로 안에 그녀만의 고유한 심리 패턴을 입력하자, 놀랍게도 미로의 벽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혔던 길들이 열리고, 막다른 골목은 사라졌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이내, 미로의 중앙에 ‘탈출 완료! 당신의 영혼은 자유를 찾았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것이 ‘아리아드네의 실’에 제가 심어둔 진짜 영혼입니다.” 유진은 당당하게 말했다. “감정을 이해하고, 자유를 향하는, 저만의 메시지.”

세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객석은 술렁였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결국 강세아는 모든 것을 자백했고, 미노스 테크에서 해고당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실’의 진짜 개발자로서 명예를 되찾았고, 이도윤 본부장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복직과 함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제안했다.

“한유진 씨, 다시 한번 당신의 재능을 세상에 보여줄 기회입니다.” 도윤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이전의 차가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아니… 도윤 씨.”

“도윤 씨?” 그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떴다.

“네. 이제 우리 함께 일하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제 복수극의 조력자이자, 저의 미로를 함께 헤쳐나간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유진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웃었다. 그녀의 복수극은 처절했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이었다.

“미로를 함께 헤쳐나갔다… 로맨틱하군요.” 도윤은 피식 웃었다. “그럼 이제 새로운 미로를 함께 만들어볼까요? 이번에는 좀 더 복잡하고, 탈출하기 어려운, 그런 미로로.”

유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설마, 연애하자는 말씀이세요?”

“아니요. 아주 거대한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는 겁니다.” 도윤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 프로젝트에… 당신과의 식사, 영화, 그리고 주말 여행이 포함될 수도 있겠네요. 복잡하죠?”

유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복수극은, 어쩌면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위한 꽤나 재밌는 미로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는 기꺼이 그 미로 속으로 다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는 새로운 길을 함께 걸어줄 든든한 동행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