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밤, 별들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스튜디오에는 DJ 은하의 목소리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창밖은 온통 어둠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무수한 별빛을 담고 있는 듯 반짝였다. 헤드폰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은하는 가슴 한편에 자리한 낯익은 그리움을 느꼈다.
“별밤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DJ 은하입니다. 오늘 밤도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혹시 창밖을 내다보고 계신가요? 까만 도화지 위에 은가루를 뿌린 듯, 별들이 촘촘히 박혀 빛나고 있네요.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빛나지만, 결국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우리들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은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유독 가슴이 저릿한 사연 하나가 도착했었다. 도착한 메일 중에서도 유난히 그녀의 마음을 끈, 오랜 시간을 묵힌 듯한 진심이 담긴 이야기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그 글 속의 감정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였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도윤 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도윤 님은 지금 어떤 별 아래에 계실까요? 함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은하는 조심스럽게 메일을 열어 읽기 시작했다.
오래된 사진첩 속의 웃음
“은하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른 중반의 도윤이라고 합니다. 문득 잠 못 드는 밤,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낡은 사진 속에는 열 살 남짓의 제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고, 그 옆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께서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할아버지의 품에는 제가 서툴게 만들어 드렸던 종이배가 들려있었죠.”
“할아버지는 언제나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언제나 ‘괜찮다’며 제 등을 쓸어주셨죠. 특히 제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할아버지의 정원이었습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작은 낙원이었죠. 저는 그곳에서 흙장난을 하고, 물을 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꽃 이름을 외울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은하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녀의 기억 속에도 비슷한 정원과 다정한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저는 그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사춘기가 찾아오고, 저는 할아버지의 ‘구식’ 방식이 싫었습니다. 낡은 옷차림, 느릿한 걸음걸이,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들이 지겹게 느껴졌죠.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정원에 새로 심은 꽃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때였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놀러 갈 생각에 마음이 급해서, 그만 불쑥 짜증을 내고 말았습니다. ‘됐어요, 할아버지! 전 그런 거 관심 없어요! 그냥 혼자 하세요!’”
“그때 할아버지의 얼굴에 스쳤던 실망감… 저는 아직도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 저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돌아왔고, 할아버지는 조용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는 다시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분께 제 짜증을 후회한다고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스튜디오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은하는 메일을 읽는 내내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도윤 님의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후회와 상실감,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애통함이 그녀의 가슴을 때렸다.
“그날 이후, 저는 할아버지의 정원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 정원에는 제가 버린 후회와 함께 할아버지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 같아서요. 시간이 흐르고, 저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날의 기억은 제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한마디만 더 다정하게 말했다면, 마지막 순간에 따뜻한 미소라도 보여드렸다면… 그랬다면 지금 제가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까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봅니다. 저 별들 중 하나가 할아버지의 별이 아닐까, 하고요. 은하 DJ님, 만약 우리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제 와서야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정원은 지금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제 마음속의 정원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은하는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도윤 님, 사연 정말 감사합니다. 메일을 읽는 내내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후회라는 감정은 참으로 무겁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향해 끊임없이 ‘만약’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니까요. 하지만 도윤 님, 할아버지께서는 분명 도윤 님의 마음을 아실 거예요. 그날의 서툰 짜증보다는, 그 정원에서 함께했던 수많은 행복한 기억들을요.”
“어쩌면 우리가 소중한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마지막 기회는, 매 순간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고맙다고 표현하고, 때로는 미안하다고 용기를 내는 그 모든 순간이요. 비록 할아버지의 정원이 폐허가 되었다고 해도, 도윤 님의 마음속 정원은 여전히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그 정원은 절대 폐허가 될 수 없을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심어놓으신 사랑이 뿌리 깊게 박혀 있으니까요.”
은하는 스튜디오의 유리창 너머로 깜빡이는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그 불빛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이고, 누군가의 이야기일 터였다.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휴대폰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소원해진 언니의 이름이 저장된 휴대폰.
“도윤 님의 사연을 들으며, 저 역시 제 안의 닫힌 문 하나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마음속에 돌보지 못한 정원 하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원이 황폐해지기 전에, 우리는 그곳에 다시 사랑과 용기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죠.”
그녀는 감정을 가다듬고 다음 곡을 소개했다.
“도윤 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밤 자신의 정원을 되돌아보고 계신 모든 분을 위해 이 곡을 띄워드립니다. 故 김광석 님의 ‘사랑했지만’ 입니다. 부디, 도윤 님의 마음속 아픈 정원에 작은 위로의 비가 내리기를 바랍니다.”
잔잔한 기타 선율과 김광석의 애절한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은하는 헤드폰을 벗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귀에는 멜로디와 함께 도윤 님의 사연, 그리고 오래전 언니와 함께 깔깔거리며 웃던 유년의 기억이 겹쳐 들리는 듯했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가꾸던 작은 텃밭. 그 텃밭에 심었던 방울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던 모습.
노래가 끝이 나고, 은하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조금 더 단단한 결심이 실려 있었다.
“노래 잘 들으셨나요? 사랑했지만, 혹은 사랑하고 있지만, 우리가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마음들은 항상 이렇게 잔상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잔상들이 우리를 아프게만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용기, 혹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를요.”
“오늘 밤, 여러분의 마음속 정원은 안녕하신가요? 혹시 황량하게 방치된 곳은 없는지, 따뜻한 시선으로 한번 둘러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만약 그곳에 메마른 흙만 남아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작은 씨앗 하나를 심어보세요. 그 씨앗이 언젠가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요.”
방송을 마무리하며 은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언니’라고 저장된 이름을 잠시 응시했다. 화면 속 글자가 마치 그녀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망설이던 손가락이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통화 버튼을 향해 움직였다. 이 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그녀의 작은 용기가 또 다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스튜디오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고, 은하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다음 곡이 흘러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