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적막은 단 한 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거대한 기동병기 ‘천둥매’의 조종석에 앉은 류의 귓가에는 끊임없이 경고음과 교신음이 뒤섞여 울렸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고, 에너지 블레이드가 도시의 잔해를 갈라대는 굉음 속에서, 그는 오직 살아남고 파괴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폭풍의 늑대 07, 적성 크릴족 생체 병기 세 시 방향! 제거!”
헤드셋 너머로 다급한 지시가 떨어졌다. 류는 망설임 없이 조이스틱을 꺾었고, 천둥매의 거대한 팔에 장착된 플라스마 캐논이 섬광을 뿜었다. 굉음과 함께 저 멀리 도심을 가로지르던 크릴족의 유기체 병기가 폭발하며 녹색 혈액을 흩뿌렸다. 핏빛 노을이 지는 황폐한 도시 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젠장, 끝이 없어!”
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수십 년째 이어지는 ‘공명 전쟁’. 크릴족과의 끝없는 싸움은 이미 인류에게 지긋지긋한 일상이었다. 그들은 지구의 자원을 노리는 침략자였고, 인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수호자였다. 그게 류가 배워왔고, 믿어왔던 전부였다.
그 순간, 천둥매의 경고등이 붉게 번쩍였다. “치명타! 좌측 날개 손상! 동력 계통 불안정!”
“뭐?!”
류의 눈앞에서 수많은 오류 메시지가 폭주했다. 방금 전 격추한 크릴족 병기가 마지막 발악으로 내뿜은 에너지 파동이 예상치 못한 각도로 천둥매를 강타한 것이다. 기체가 심하게 요동치며 중심을 잃었다. 류는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움켜쥐었지만, 거대한 강철 조류는 중력에 항복하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
추락 지점은 폐허가 된 도시 외곽, 인적이 끊긴 오래된 공동묘지였다. 천둥매는 한쪽 날개가 부러진 채 흉물스럽게 박혔고, 류는 간신히 비상 탈출해 파손된 조종석 밖으로 기어 나왔다. 온몸이 쑤시고 피가 배어났다. 통신기는 먹통이었고, 주변에는 오직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젠장,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그는 허리춤의 생존 키트를 움켜쥐고 주위를 경계했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와 녹슨 조각상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 곳. 그곳에서 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무덤 비석 아래, 섬광에 불타 반쯤 녹아내린 크릴족의 생체 병기 잔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형태의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키는 인간보다 훨씬 작았고, 마치 유기체와 기계가 섞인 듯한 매끄러운 검은 피부 위로 푸른색과 보라색의 섬광이 미세하게 흘렀다. 얇은 팔다리와 섬세한 손가락, 그리고 눈 대신 빛을 내는 수정 같은 핵이 얼굴 중앙에 박혀 있었다.
‘크릴족의 코어 유닛인가?’
류는 본능적으로 허리의 권총을 뽑아 들었다. 저것은 분명 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공격받아도 저항할 기미조차 없이 그저 웅크린 채 미세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류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감각이 밀려왔다. 고통. 극심한 고통과 함께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두려움이, 마치 자신의 감정인 양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는 혼란스러워 권총을 겨눈 손을 잠시 멈칫했다.
“뭐… 뭐지?”
크릴족 코어 유닛의 수정 핵에서 푸른빛이 깜빡이더니, 류의 머릿속에 또 다른 이미지가 전송되었다. 그것은 푸른 행성의 드넓은 초원, 영롱하게 빛나는 크리스탈 숲, 그리고 그곳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크릴족들의 모습이었다. 환상 같은 아름다움과 함께 느껴지는 것은, 지켜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리고 파괴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바라보는 듯한 슬픔과 절망.
류는 자신도 모르게 권총을 내려놓았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크릴족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파괴하고 침략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감정들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너… 괜찮은 거냐?”
류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코어 유닛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듯 가만히 있었지만, 수정 핵의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지며 이번에는 다른 이미지를 보냈다. 자신을 덮친 폭발, 부서진 동료들, 그리고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 그것은 카이라, 즉 이 코어 유닛의 이름이자 정체였다.
류는 가까이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카이라의 몸을 살폈다.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에 있는 듯한 표면 곳곳이 부서져 있었고, 에너지 회로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그는 의료 키트에서 소독액과 거즈를 꺼내들었다.
“나를… 공격하지 않는 건가?”
카이라의 수정 핵이 류를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의 얇은 손가락이 류의 강철 갑옷을 향해 뻗어왔다. 차가운 금속 위에 닿은 그녀의 손끝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 번, 류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영상.
이번에는 류 자신의 기억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꽃밭을 거닐던 모습, 아버지가 해주던 따뜻한 이야기,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웃고 떠들던 전장 이전의 평화로운 나날들. 카이라는 그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 속에서 ‘평화’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찾아내고 있었다.
류는 숨을 멈췄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증오와 분노가, 이 작은 크릴족 개체를 통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카이라에게서 위협을 느끼는 대신, 묘한 연대감을 느꼈다. 어쩌면, 전쟁이란 결국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카이라는 침묵으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밤낮을 폐허 속에서 함께 보냈다. 류는 천둥매를 수리하며 구조 신호를 보내려 애썼고, 카이라는 그의 곁을 맴돌며 그녀의 방식으로 위로를 보냈다. 그들의 언어는 달랐지만, 감정의 언어는 통했다. 류는 카이라에게서 그의 종족이 ‘야만적 침략자’라 불렀던 크릴족의 본질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싸우는 존재였고, 그녀의 종족 또한 각자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가진 문명이었다.
“만약 이 전쟁이… 우리 모두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째야 하는 거지?” 류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카이라의 수정 핵은 그를 향해 고요히 빛났다. 그녀는 대답 대신, 류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차가운 금속 위에 닿는 따뜻한 온기. 류는 그 온기 속에서 묘한 평온을 느꼈다. 인류와 크릴족, 영원한 적이라 믿었던 두 종족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이었다.
***
그날 밤,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멀리서 인간 기동 병기들의 탐색 등불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류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구조대가 온 것이다. 그는 동시에 기쁘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카이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은 분명 그녀를 적이라 규정하고 제거하려 들 것이다.
“류, 폭풍의 늑대 07! 응답하라! 류!”
헤드셋 너머에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천둥매의 조종석에 올라탔다. 아직 완벽히 수리되지 않았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기체가 굉음을 내며 일어섰고, 그 순간 탐색 등불이 천둥매가 추락한 곳을 비췄다.
“찾았다! 류 소위님! 무사하십니까?”
천둥매의 뒤에서 빛을 내던 카이라를 본 동료는 경악했다.
“저, 저건… 크릴족 코어 유닛! 류 소위님, 위험합니다! 당장 제거하십시오!”
동료의 기동 병기가 무기를 겨눴다. 류의 시선이 조종석 안의 모니터와, 천둥매의 발치에 서 있는 카이라를 오갔다. 그녀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오직 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수정 핵은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지배했던 명령과 의무, 그리고 종족에 대한 충성심이 그의 뇌리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이미 다른 것을 택하고 있었다. 차가운 강철 속에서 피어난, 따뜻하고 금지된 울림을.
“물러서라.”
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동료는 충격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내 문제다.”
천둥매의 플라스마 캐논이 번뜩였다. 류는 동료들을 향해 조준하는 대신, 기체의 방향을 틀어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에너지를 발사했다. 거대한 섬광이 밤하늘을 갈랐다. 그것은 선전포고이자, 결별의 신호였다.
“류 소위님!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반역입니까?!”
동료의 절규가 귓가를 때렸지만, 류는 이미 뒤돌아설 수 없었다. 그는 천둥매의 다리를 조작해 카이라의 곁에 웅크렸다. 카이라의 수정 핵이 더욱 밝게 빛나며 류의 강철 심장에 따뜻한 공명을 보냈다.
거대한 강철 심장 속에, 미약하지만 분명한 별이 피어났다. 그것은 모두가 금지라 말하는 사랑이었고, 온 우주가 적대하는 두 종족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류는 천둥매의 조종간을 움켜쥐고, 카이라를 품에 안듯 보호하며 폐허 속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앞에는 미지의 길과 끝없는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