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찢긴 듯, 달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 재개발 예정 지구의 낡은 건물 잔해들이 앙상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었다. 비릿한 흙먼지와 썩어가는 시멘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지훈은 그 악취 속에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낡은 창고 안, 한때는 누군가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었을 텅 빈 공간에, 지금은 오직 그의 숨소리와 칼끝이 돌 바닥을 긁는 소리만이 날카롭게 울렸다. 붉은 초 네 자루가 사방에 놓여 탁한 공기를 간신히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로, 그는 검은 천을 깔고 그 위에 정교한 문양을 피로 그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손목을 그어 흘린, 뜨겁고 끈적한 피. 선명한 핏줄기를 따라 섬뜩한 주술 문자가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창고 안의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냉기가, 초여름 밤인데도 살을 에는 듯했다.
“윤세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비수처럼 차가웠다. 피로 얼룩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의 눈은 흔들림 없었다. 문득, 찢어질 듯한 고통과 함께 과거의 잔상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 * *
“지훈아, 우리가 해냈어! 진짜 신물을 찾았다고!”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세아의 눈빛은 순수한 광기로 가득했다. 폐쇄된 병원 지하, 곰팡이 냄새 가득한 미로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마침내 전설 속의 ‘나선각’을 찾아냈다. 그 검고 기괴한 형상의 유물 앞에서,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이제는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만이었다.
“미안해, 지훈아. 이건… 어쩔 수 없었어.”
귓가에 속삭이던 그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했다. 내가 ‘그것’에게 속박당해 절규하던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손길. 그녀는 나를 밀어냈다. 나를 미끼로 던지고, 자신은 ‘나선각’과 함께 달아났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나는 육체가 찢기고 영혼이 부식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 살았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아니,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내 살점 하나하나에 각인된 그 비참함과 굴욕감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갈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나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나선각보다도 더 잔혹하고 원시적인 힘을.
* * *
“세아, 네가 내게 안겨준 그 지옥을 이제 네게 돌려줄 차례야.”
지훈은 핏빛 문양의 마지막 획을 그었다. 완성된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차갑던 공기가 갑자기 뜨거워지더니, 붉은 초의 불꽃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창문 없는 창고 안인데도,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듯한 매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는 검은 천 위에 놓인, 세아의 사진을 응시했다. 몇 년 전, 아직 순수했던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 그 아래에는 그녀가 늘 지니고 다니던 은제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나선각’을 찾아 헤매던 시절,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추억의 증표.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거짓과 기만의 상징일 뿐이었다.
“넌 언제나 네가 얻고자 하는 것에만 집착했지. 그게 타인의 희생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그의 손이 느릿하게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차갑고 묵직한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제 이 목걸이는 그녀의 영혼을 붙잡아 매는 덫이 될 터였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었다. 눈을 감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고대의 언어, 인간의 입으로는 내뱉기 힘든, 긁히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들이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을 둘러싼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창고의 벽이 일렁이는 환영에 휩싸였다. 핏빛 문양이 이글거리며 섬뜩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문양이 빛을 발하자, 천장 없는 지붕 너머의 어둠에서 무언가가 반응하듯 낮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심해에서 깨어난 거대한 존재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끔찍한 울림이었다. 낡은 창고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벽에 금이 가고,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검고, 그 안에서 붉은 불꽃이 이글거렸다.
“나를 배신한 대가가 얼마나 잔혹한지, 네게 똑똑히 보여줄게. 윤세아.”
그의 마지막 말이 공기를 찢고 메아리쳤다. 그 순간, 먼 곳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던 기분 나쁜 비명 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히 들렸다.
복수의 서막이 올랐다. 그리고 이 비명은 시작에 불과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