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심장에 깃든 율법
서기 2347년, 서울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수정처럼 빛나는 마천루와 플라잉 카의 물결로 이루어진 신(新) 서울, 또 다른 하나는 거대한 콘크리트 괴수의 뼈대처럼 뒹구는 폐허의 바다, 구도심이었다. 김민준은 그 구도심의 먼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의 낡고 육중한 작업용 메카, ‘철마’는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무너진 건물 잔해를 헤치고 나아갔다.
“젠장, 오늘은 영 시원찮네.”
민준은 메카 조종석 안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늘 그랬듯 회색빛이었다. 바람은 찢겨진 철골 구조물 사이를 휘파람처럼 통과하며 삭막한 노래를 불렀다. 폐기된 부품을 찾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게 그의 삶이었다. 신 서울의 번쩍이는 불빛은 이곳까지 닿지 않았다.
그날은 유난히 수확이 없었다. 민준은 지겨운 마음에 평소에는 가지 않던 구역으로 철마를 몰았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완전히 잊혀진 지역. 거대한 상업 지구의 잔해 속에서 솟아 있던 오래된 지하기지 입구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철마의 손가락 끝에 달린 작업등이 좁은 통로를 비추자, 먼지 구덩이 속에 숨겨진 낡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곳에 이런 게… 보물이라도 찾았나?”
기대감 반, 불안감 반으로 철마의 거대한 팔이 녹슨 문을 열어젖혔다. 끽, 하는 쇠 긁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안은 거대한 홀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진 거대한 석판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푸른색 결정체가 떠 있었다.
민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본 어떤 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크리스탈은 끊임없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은은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주변의 기계 장치들은 모두 기능을 잃었지만, 이 결정체만은 홀로 영롱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원의 핵….”
무심코 뱉어낸 말이었다. 그는 마치 홀린 듯 철마를 움직여 결정체에 다가갔다. 결정체는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철마의 로봇 팔을 뻗어 결정체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섬광이 터지듯 강렬한 푸른빛이 홀을 가득 채웠다.
크아앙!
철마의 시스템이 오류음을 내며 흔들렸다. 민준의 조종석 안에서도 비상등이 깜빡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기계적 충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깨졌다. 푸른빛은 철마의 구동부를 따라 흐르며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기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낡은 패널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고대의 언어인가? 아니면 단순한 에러 코드인가?
쿵! 쿵! 쿵!
철마의 심장, 즉 메인 코어에서부터 강렬한 박동이 느껴졌다. 그 박동은 민준의 심장과 공명하며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린 푸른 결정체, ‘시원의 핵’은 철마의 코어와 완벽하게 연결된 듯 보였다.
“이… 이건 대체….”
민준은 스크린에 나타난 알 수 없는 코드와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보며 당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흥분이 그를 감쌌다. 철마는 더 이상 낡은 작업용 메카가 아니었다. 기체 전체에서 미세한 푸른 오로라가 뿜어져 나왔다. 민준은 홀린 듯 레버를 당겼다.
위이잉!
철마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육중한 발소리 대신, 마치 공중을 미끄러지듯 유려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민준은 믿을 수 없었다. 낡은 고철 덩어리가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니! 그는 폐허 속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속도, 민첩성, 그리고 알 수 없는 에너지까지. 그의 철마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
“미확인 에너지 반응 포착! 즉시 포획하라!”
민준이 구도심의 낡은 지상으로 올라온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하늘에서 거대한 수송선들이 내려왔다. ‘크로노스 산업’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수송선 아래로, 날렵한 전투 메카들이 연쇄적으로 강하했다. 그들의 무장은 민준의 낡은 철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젠장! 벌써 들킨 건가?!”
민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철마를 움직였다. 적어도 다섯 대의 전투 메카가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장은 레이저 캐논과 고속 미사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콰아앙!
첫 번째 레이저가 철마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며 땅을 녹였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철마의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철마의 팔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레이저와 부딪혔다. 레이저는 마치 거대한 벽에 부딪힌 듯 흩어져 버렸다.
“뭐… 뭐야?”
민준은 믿을 수 없었다. 이런 방어막 기능은 원래 없었다!
“에너지 필드 감지! 고대 문명 패턴과 일치합니다!”
“말도 안 돼! 저런 구형 메카가… 전력을 증폭시켜!”
크로노스 산업의 조종사들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민준은 그들의 당황하는 목소리를 듣고 확신했다. 시원의 핵이 발현시킨 힘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촤자작!
적들의 공격이 쏟아져 들어왔다. 민준은 무작정 피하는 대신, 철마의 팔을 휘두르며 푸른빛의 방어막을 형성했다. 방어막은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민준은 문득 깨달았다. 이 푸른 에너지에는 일종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마치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좋아, 한번 해보는 거야!”
그는 심호흡을 하고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스크린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번뜩였다. 그는 그 문양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철마의 다리를 움직였다.
위이이잉-! 콰과광!
철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앞에 있던 적들은 민준의 메카가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에 당황했다. 이내 그들은 뒤늦게 등 뒤에서 들리는 폭발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철마가 일으킨 푸른 잔상 뒤에는, 마치 순간이동을 한 듯, 파괴된 적의 메카가 뒹굴고 있었다.
“시간 가속… 아니, 공간 도약인가?”
민준은 자신이 방금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지 강렬하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철마는 그 의지에 따라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율법’이었다. 물리법칙을 왜곡하고 재정의하는 고대의 힘.
크로노스 산업의 정예 부대는 점점 더 민준의 철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들의 기술로는 이 알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놈의 움직임이 예측 불가능합니다! 마치… 공간을 접는 듯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전술 재정비! 모든 전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좁혀라! 저 핵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수송선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준은 자신을 향해 조여 오는 포위망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가장 높은 폐허, ‘구-N 타워’를 향해 철마를 몰았다. 과거 번성했던 도시의 상징이었던 그곳은 이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민준이 시원의 핵의 힘을 최대한 발휘하기에 가장 좋은 전장이 될 터였다.
구-N 타워의 정상. 민준은 철마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서 크로노스 산업의 메카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모든 무장을 개방하며 일제히 포격을 퍼부었다.
콰콰콰쾅!
레이저와 미사일의 융단폭격이 철마를 향해 쏟아졌다. 민준은 조종석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원의 핵이 품고 있는 ‘율법’에 집중했다. 그의 심장이 푸른빛으로 물드는 듯했다.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철마의 기체에서 엄청난 푸른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주변을 감싸던 포격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공중에서 정지했다. 미사일은 멈췄고, 레이저 광선은 흐릿한 빛의 줄기로 굳어버렸다.
“시간… 정지?”
크로노스 산업의 조종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민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철마의 팔을 움직이자, 멈춰 있던 미사일들이 방향을 틀어 적의 메카들을 향해 날아갔다. 레이저 광선은 그 경로를 되짚어 발사지로 돌아갔다.
콰아아앙! 쾅! 쾅!
자신들이 쏜 무기에 역으로 당한 크로노스 메카들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혼란 속에서 남은 메카들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민준의 철마가 더 이상 ‘메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고대의 힘을 빌려 현세에 강림한 ‘율법의 화신’과 같았다.
최후의 한 대가 불타며 추락하자, 구-N 타워 정상에는 민준의 철마만이 푸른빛을 발하며 서 있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시원의 핵의 힘을 다루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새로운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율법의 힘.”
민준은 시원의 핵과 동화된 철마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낡은 고철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강철 심장이었다. 신 서울의 번쩍이는 불빛 아래, 구도심의 폐허 속에서 깨어난 고대의 마법은 이제 김민준이라는 한 사내와 함께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었다. 세계는 아직 이 작은 파동이 일으킬 거대한 쓰나미를 알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