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손전등 불빛만이 겨우 그 영역을 주장할 뿐, 나머지는 태초의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축축한 공기는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시큼한 흙냄새와 함께 미지의 향을 뿜어냈다. 바닥에 깔린 이끼는 발소리를 몽롱하게 흡수했고, 천장에서는 간헐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고인 물웅덩이에 잔잔한 파문을 그렸다.
“하… 하준 씨, 제발, 그 돌멩이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아요. 여기 습기 때문에 제 머리카락도 지금 지도를 그리고 있다고요.”
윤서아는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탐사복의 후드도 이미 축축하게 젖어 어깨에 척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최신식 레이저 거리 측정기는 고요한 공기 속에서 ‘삐빅’ 하는 기계음을 간간이 내뱉었다.
“서아 씨, 이건 그냥 돌멩이가 아니라… 젠장, 이건 인류 문명의 잃어버린 조각이라고요! 이 얼마나 경이롭고, 장엄하며… 아, 감격스럽기까지 한 순간입니까!”
강하준은 제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낡은 석벽에 바짝 다가붙었다. 그의 머리 위로 위태롭게 매달린 손전등이 흔들리며 벽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들을 더욱 생생하게 비췄다. 그의 안경은 이미 습기로 뿌옇게 변해 있었지만, 그 너머의 눈동자는 마치 금방이라도 보물을 발견할 듯이 형형하게 빛났다. 누가 보면 저 벽에 대고 청혼이라도 할 기세였다.
“네, 네, 알겠어요. 경이로운 건 알겠는데, 경이로운 거 구경하다가 벽에 머리 박고 경이롭게 기절하고 싶진 않네요. 일단 우리 위치부터 제대로 파악해야죠. 아까 들어온 통로, 뭔가 이상해요. 분명히 지도에는 없었는데…”
서아는 불안한 시선을 뒤편으로 던졌다. 그들이 겨우 기어들어온 통로는 좁고 불안정했다. 마치 땅속에 억지로 뚫어놓은 벌레 구멍 같았다. 원래 탐사 루트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아니, 이 지하 유적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준은 서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손가락으로 벽의 문양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에는 연구에 몰두한 학자 특유의 광기 어린 열정이 피어올랐다.
“서아 씨, 이 문양을 보세요. 이 독특한 필체와… 이 상형문자들… 이건 분명 고대 ‘아르카나 제국’의 양식과 유사하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훨씬 더 오래된 문명의 흔적을 담고 있어요. 이 돌 벽화는… 어쩌면 이 거대한 지하 유적의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하준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그의 손이 벽의 한가운데, 유독 매끄럽고 둥근 홈이 파인 곳을 짚었다. 그 홈은 마치 무언가를 끼워 넣기 위해 만들어진 듯 완벽한 원형이었다.
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열쇠요? 그럼 열쇠는 어디 있는데요? 제가 팝콘이라도 가져와서 이 벽이 스스로 문을 여는 걸 구경할까요?”
“그건 아직… 하지만!” 하준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번뜩였다. “기다려 봐요! 아까 우리가 들어올 때 그… 그 정체불명의 돌 조각! 서아 씨, 주머니에 있죠? 보여줘 봐요!”
그제야 서아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들이 통로를 지날 때 우연히 발에 채여 발견한, 손바닥만 한 매끄러운 검은 돌 조각이었다. 마치 인공적으로 가공된 듯, 한 면이 완벽한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는 그냥 특이한 돌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거요? 설마… 에이, 농담이죠?” 서아는 의심스럽게 돌 조각을 꺼내 하준에게 내밀었다.
하준은 돌을 거의 빼앗듯이 받아 들더니, 곧바로 벽의 원형 홈에 갖다 댔다. 놀랍게도 돌 조각은 홈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홈과 돌 조각 사이의 미세한 틈새마저 사라졌다.
“봤죠? 서아 씨!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이 유적은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겁니다!” 하준은 어린아이처럼 깡총거렸다. 안경 너머의 눈은 이제 거의 폭주 직전의 광채를 띠고 있었다.
“어… 음… 신기하긴 하네요.” 서아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살짝 당황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완벽한 일치였다.
돌 조각이 홈에 끼워지자, 갑자기 석벽 전체에서 옅은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심해의 해초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 빛은 벽에 새겨진 문양들을 따라 흐르더니, 이내 중앙에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아치형 문으로 모여들었다.
**우우웅—!**
낮고 웅장한 진동이 지하 전체를 흔들었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고, 바닥의 이끼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 어어?! 하준 씨! 이거 너무 심상치 않은데요?!” 서아는 불안감에 하준의 팔을 붙잡았다.
하준은 이미 눈이 휘둥그레져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아 씨! 봐요! 문이 열리고 있어요! 이럴 수가! 전설로만 전해지던 ‘시간의 문’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아치형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서서히 밀려들어갔다. 수천 년의 세월을 짊어진 듯, 삐걱이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크게 울렸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고 검은 어둠이었다. 마치 빛을 삼켜버리는 듯한, 아득한 심연.
“와… 뭐야 이거… 블랙홀이에요?” 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직감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저 안은 분명히 위험했다.
하준은 이미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흥분과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아 씨, 이건 위험한 곳이 아니에요! 이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자, 미지의 비밀이 잠든 지식의 보고입니다! 자, 빨리!”
그는 서아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서아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하준의 등에 거의 엉겨 붙을 뻔했다.
“잠깐만요! 하준 씨! 갑자기 그렇게 확 잡아끌면…! 제가 오징어도 아니고!” 서아는 기어이 하준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밀쳤다. 하준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죄송해요, 서아 씨! 하지만 이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자, 어서요! 저 안에는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비밀이 잠들어 있을 거예요!”
하준은 서아의 손을 놓지 않고 마치 홀린 듯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아는 한숨을 쉬면서도 그를 따랐다. 그의 손은 의외로 따뜻했고, 그의 열정이 묘하게 전염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자, 차가운 공기가 그들의 피부를 스쳤다. 빛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어쩐지 그들의 손전등 빛마저도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이상하다… 분명히 손전등을 켰는데, 왜 이렇게 어둡죠?” 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손전등은 평소와 다름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은 마치 거대한 어둠 속에 흡수되는 듯했다.
“이건… 단순히 어둠이 아니에요. 이건… 공간의 특성, 혹은 고대 마법의 잔재일 수도 있어요.” 하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시금 학자 특유의 분석적인 색채가 깔렸다.
**털썩!**
갑자기 서아의 발밑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고꾸라졌다.
“서아 씨!” 하준이 놀라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서아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하준의 품속으로 와락 안겼다.
그들의 손전등이 어둠 속을 마구잡이로 비추며 흔들렸다. 서아의 얼굴은 하준의 가슴에 파묻혔고, 그녀의 손은 반사적으로 하준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밀착에 두 사람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축축하고 쿰쿰한 흙냄새 사이로 하준의 살짝 땀에 젖은 듯한 체향이 느껴졌다.
“크… 크흠! 서… 서아 씨, 괜찮아요?!” 하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서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네, 네에! 괜찮아요! 다리… 다리가 삐끗해서… 죄송해요, 하준 씨!”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하준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방금까지 닿아있던 하준의 품이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이 여전히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준도 애써 침착한 척 했지만, 그의 귀 끝은 여전히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손으로 손전등을 제대로 잡았다.
“별 말씀을요! 괜찮으시면 됐어요! 이… 이곳은 바닥이 고르지 않은 것 같으니 조심해야겠어요!”
그들이 다시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손전등 불빛이 좌우로 흔들리며 어둠의 장막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게… 뭐야…?” 서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원형 홀의 가장자리였다. 홀의 중앙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한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모두 기이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석상들의 머리 위에는 각각 푸른빛을 내뿜는 크리스탈이 박혀 있었다. 그 크리스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빛이 홀 전체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벽면에는 아까 본 문양들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복잡하고 화려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들은 고대 문명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듯했고, 그 중심에는 항상 한 명의 여인이 등장했다. 머리에는 화려한 장식을 하고, 손에는 빛나는 구체를 들고 있는 여인.
“여신… 이건 분명 ‘태초의 여신’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그리고 저 크리스탈은… 전설 속 ‘별의 눈물’이 분명해요!” 하준은 거의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한 학자의 흥분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서아는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인의 표정은 신비로우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마치 살아있는 듯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근데 이 그림들, 여인의 표정이 왜 이렇게… 슬퍼 보이죠? 그리고 이 거대한 홀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요? 마치 모두가 숨죽이고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그때, 홀 중앙에 있는 가장 거대한 석상, 용의 형상을 한 석상의 눈에서 푸른빛이 깜빡이더니, 석상 전체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석상의 입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그 기운은 이내 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콰아앙—!**
홀의 반대편 벽에서 거대한 소리와 함께 또 다른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거대한 문이었다. 그 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알 수 없는 종류의 강렬한 에너지였다.
“하준 씨, 저 안에… 뭐가 있을까요?” 서아는 무의식적으로 하준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하준의 눈은 이미 저 너머의 어둠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흥분이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미약한 불안감,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뒤섞여 있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이곳이 우리가 찾던 진정한 시작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불안과 호기심,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교차하는 시선이었다.
열린 문 너머의 어둠은 그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그리고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