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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의 심장, 도시의 그림자 – 제 12화: 붉은 달의 서약

고요한 밤, 낡은 사원의 돌담 아래 그림자가 짙었다. 바람은 싸늘했고, 멀리 도시의 웅성거림마저 이 외진 곳에서는 잊힌 것처럼 들렸다. 서하는 손목을 비틀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걸린 조각달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기운이 스며든 달빛은 마치 핏빛 눈동자처럼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매번 같은 자리, 같은 시간. 하지만 심장은 언제나 처음인 듯 격렬하게 울렸다.

“늦는군….”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그녀 스스로도 낯설게 들렸다. 불안감이 목을 조여왔다. 오늘따라 순찰대의 발소리가 더 자주 들렸고, 제국 경비대의 마차 행렬도 밤늦도록 이어진 것을 보았다. 분명 어딘가에서 문제가 터진 것이리라.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일,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한층 더 위험하게 만들 일들.

사원 뒤편의 낡은 종각에서 짧게, 세 번. 미세한 바람 소리마저 삼킬 듯한 침묵 속에서 익숙한 신호가 울렸다. 서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왔어.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존재. 인간의 오감을 아득히 뛰어넘는 감각을 가진 자.

갈대밭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일렁였다. 짐승의 것이면서도 인간의 깊이를 담은, 짙은 금색 눈동자. 서하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이 세상의 모든 위험을 담고 있으면서도,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온기로 번뜩였다.

“카인.”

그의 이름이 입술 사이를 벗어나자마자,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긴 팔이 서하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짙은 숲의 향기, 그리고 차가운 밤공기와는 상반되는 따뜻한 그의 온기가 전해졌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순찰이 강화되었더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서하의 귓가에 닿는 순간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변했다. 그의 턱이 그녀의 정수리에 닿았다. 서하는 그의 품에 안겨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짧은 재회가 얼마나 간절했던가. 지난 한 주가 십 년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서하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뺨에는 긁힌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숲의 가시나무에 스친 상처일까. 아니면… 또 다른 충돌의 흔적일까.

카인은 손가락으로 서하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은 항상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그의 종족이 가진 본능적인 힘이 그녀에게 해를 끼칠까 봐.

“작은 충돌이 있었을 뿐이다. 숲 가장자리를 침범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할 게다.”

마지막 말에 담긴 서늘한 어조에 서하는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할 게다’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들, ‘숲의 종족’에게 있어서 숲은 생명 그 자체였다. 인간 제국이 ‘야인족’이라 멸시하는 그들을 숲은 품어주고, 그들의 존재를 지켜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리고 그 안식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중앙 평의회에서… 또 무슨 새로운 칙령이라도 내린 거야?”

서하는 초조하게 물었다. 그녀는 제국 내에서도 비교적 높은 직책에 있는 가문의 딸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제국의 분위기를 잘 알았다. 최근 들어 ‘야인족 정화’에 대한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도시 외곽에 사는 이들의 막연한 두려움 정도로 치부되던 것이, 이제는 제국 전체의 공론장으로 올라와 공식적인 정책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카인은 한숨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숲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있다. 그들은 숲의 ‘심장’을 노리고 있어. 오래된 예언서에 기록된 ‘정화의 불꽃’을 찾고 있다고. 그들은 그걸 이용해 숲을 완전히 태워버릴 생각이다.”

서하의 눈이 커졌다. “정화의 불꽃? 그게 정말 존재하는 거야? 나는 그저… 옛날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존재한다 믿고 있다. 그리고 믿음은 때로 진실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수백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인간과 ‘융화의 시대’를 열고자 했을 때에도, 결국 그 믿음 때문에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의 목소리에는 과거의 상처가 짙게 배어 있었다. 숲의 종족과 인간 사이의 화합을 꿈꾸던 ‘융화의 시대’는 결국 끔찍한 대학살로 끝이 났고, 숲의 종족은 숲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인간과의 접촉을 완전히 끊었다. 그 이후, 인간은 그들을 짐승만도 못한 ‘야인족’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사냥해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그들이 숲의 심장을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막아야 하는 거잖아.” 서하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불안감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 맞서는 것은 더 큰 피바람을 불러올 뿐이다. 이미 몇몇 동족들은 도발에 넘어가 경비대와 충돌했다. 그들은 우리의 씨를 말리려 하고 있어. 지혜로운 자들은 숨는 것을 택했지만, 젊은 피들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눈동자에 고통과 분노가 교차했다. 서하는 그 고통이 자신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아플 줄은 몰랐다. 동시에 이토록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줄 줄도.

그때였다. 사방의 정적을 깨고, 멀리서 철컥이는 쇠붙이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제국 경비대의 갑옷 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인의 금색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그는 서하를 자신에게 더욱 바싹 끌어당기며, 고개를 기울여 사원의 낡은 벽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젠장, 여기까지…!” 그의 낮은 신음이 서하의 귓가를 스쳤다.

“어떻게…!” 서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토록 외진 곳까지 그들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누군가 우리의 만남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카인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고, 사원 뒤편의 무너진 석탑 잔해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 같았다. 그의 품에 안긴 서하조차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조용했다.

잔해 틈새로 보이는 시야에, 횃불을 든 경비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듯 사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갑옷이 스치는 소리,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서하의 심장이 터질 듯 울리는 소리.

“이봐, 이쪽은 아무것도 없어! 어디로 간 거지?” 한 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이 근처에 흔적이 있었는데… ‘야인족’ 놈들이 워낙 교활해야 말이지. 냄새도 기가 막히게 숨기는 재주가 있어.” 다른 대원이 투덜거렸다.

그들은 이 숲을, 카인을 찾는 것이었다.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카인을 ‘야인족 놈들’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녀의 가슴에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카인의 심장 박동이 등 뒤로 느껴졌다. 격렬하지만 침착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맡에 입술을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숨을 쉬지 마. 그들은 냄새로도 우리를 추적할 수 있다. 아주 잠시만….”

서하는 그의 말대로 숨을 참았다. 고통스럽게 폐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경비대원들의 발소리에 집중되었다. 그들이 지나가길, 제발 이대로 지나가주길.

“대장님, 저기 오래된 우물이 보입니다. 혹시 그 안에 숨었을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한 대원의 외침이 들렸다. 카인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낡은 우물은 카인 종족의 은신처로 향하는 오래된 비밀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멍청한 놈들! 짐승 놈들이 우물 안에 숨어들어간다고? 정신 차려! 허튼짓 말고 수색이나 제대로 해!”

다행히 대장은 비웃으며 일축했다. 경비대원들의 발소리가 우물과는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는 듯했다. 서하는 겨우 숨을 들이쉬었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이토록 달콤할 줄이야.

그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을 때, 카인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고 잔해 틈새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고민과 결심이 서려 있었다.

“서하… 너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마라.”

그의 말에 서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무슨 소리야? 왜? 안 돼, 카인!”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제국의 압박은 전례 없을 정도로 강하다. 네가 이곳에 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해.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슬픔과 단호함으로 빛났다. 서하는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한 그의 처절한 선택.

“나는 괜찮아. 당신이 없는 밤은… 그 무엇보다도 위험해.” 서하는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밤바람에도 그의 피부는 여전히 따뜻했다. “우리는 함께해야 해. 당신이 숲을 지키는 것처럼, 나는 도시에서 당신을 위해….”

“사랑한다, 서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짧고 강렬한 키스. 숲의 향기가 그녀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금지된 사랑의 맛이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을 때, 그의 눈은 붉은 달빛을 받아 더욱 짙은 금색으로 타올랐다.

“나는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동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놈들이 숲의 심장에 접근하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무엇을… 할 건데?” 서하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카인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장함과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된 전사의 눈빛 같았다.

“이 모든 비극을 끝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젠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

그는 마지막으로 서하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서하는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붉은 달은 여전히 하늘에 걸려 있었고, 그 핏빛 섬광 아래 그녀는 홀로 남았다. 그의 마지막 눈빛이, 그의 비장한 결의가, 그녀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숲의 심장을 노리는 제국. 그들을 막으려는 숲의 종족. 그리고 그 모든 비극 속에서 피어난, 종족을 뛰어넘는 금지된 사랑. 서하는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위험보다 더 큰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폭풍의 한가운데, 그녀와 카인이 서있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카인을,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녀 또한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핏빛 달이 그녀의 결의를 지켜보는 듯, 더욱 붉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