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졌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멀리 아스라이 반짝였고, 그 위로는 수많은 별들이 태곳적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침묵 속에 빛나고 있었다. 스튜디오 안은 온화한 조명 아래 아늑했다. ‘별’이라는 이름의 DJ는 차분한 목소리로 마지막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매일 밤 같은 자리에 앉아 당신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이 기다림의 끝에, 우리가 다시 만나는 기적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으면서요. – 외로운 섬에서 온 청취자, ‘등대지기’님.”
별은 사연을 읽는 내내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밤하늘을 닮아 부드럽고 따스했지만, 오늘은 어딘가 모르게 미세한 떨림이 스며들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마이크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등대지기님의 사연, 잘 들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기다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그 시간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거나, 더 깊은 곳을 바라보게 할 테니까요. 그 길고 긴 기다림에, 외롭지 않도록 따뜻한 음악 한 곡 보내드립니다. 폴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
음악이 스튜디오를 채우자 별은 마이크를 내리고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는 익숙한 위로를 건넸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잔잔한 파문으로 일렁였다. 오늘따라 유독 가슴이 저릿한 사연들이 많았다. 혹은, 그녀 자신이 평소보다 더 감상적으로 변했는지도 몰랐다. 별은 손을 뻗어 따뜻한 차가 담긴 머그잔을 들었다. 찻김이 안경을 뿌옇게 만들었다. 지난 며칠간 그녀는 묘한 기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조각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음악이 끝나고 시보가 울렸다. 다시 마이크를 올린 별의 목소리가 한층 깊어졌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이 밤의 끝을 잡고 싶지만 벌써 마지막 사연을 만날 시간입니다. 마지막 사연은 한 통의 손편지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저희에게 닿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저를 위한 편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낡고 바랜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주소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별에게.’라는 세 글자가 그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편지를 펼쳤다. 종이에서 희미하게 오래된 책 향기와 옅은 바다 냄새가 났다. 마치 먼 기억 속의 한 조각이 문득 후각을 자극하는 듯했다.
잊혀진 약속의 밤
“친애하는 별에게.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내어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매일 밤 속삭이는 그 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오래전 우리만의 별을 떠올렸습니다. 기억하나요?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해 여름밤, 쏟아질 듯한 별 아래에서 함께 부르던 노래를. 그 노래는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죠.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약속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서로의 빛이 되어주자고. 별이 없는 밤에도, 마음속 등대가 되어주자고…”
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지만, 그녀는 편지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편지의 내용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녀의 과거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 여름, 그 별, 그 노래, 그리고 그 약속… 모든 것이 생생하게 그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약속보다 훨씬 거대했고, 우리는 별똥별처럼 흩어졌습니다. 저는 당신의 빛을 잃고 한참을 어둠 속에서 헤매었습니다. 당신의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우연히 듣게 된 건, 정말이지 운명 같은 일이었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저는 모든 것을 알아챘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사람들의 밤을 밝혀주는 ‘별’이더군요. 저는 아직도 그 여름날의 노래를 기억합니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멜로디를요. 혹시, 당신도 그 노래를 기억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 밤, 라디오를 통해 그 노래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당신이 저를 잊지 않았다면… 그리고 당신도 저를 그리워했다면. – 별을 찾아 헤매는 바다로부터.”
편지를 다 읽은 별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별을 찾아 헤매는 바다로부터.’ 그 이름. 그 익숙하면서도 잊으려 노력했던 이름이, 스튜디오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푸른 바다. 여름밤의 별. 그리고 그 노래.
그녀는 잠시의 정적 끝에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만,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이 뒤섞인 듯한 묘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네, 바다님. 기억합니다. 당신이 말한 그 모든 것을요. 우리가 함께 불렀던 그 노래도, 쏟아지던 별들도, 그리고 우리의 약속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늘 등대처럼 켜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는 내내,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늘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눈물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었다. 오랜 해갈의 기쁨이었다.
“네, 바다님. 당신이 그리워했던 그 노래, 들려드리겠습니다. 저희 둘만 아는, 오래전 우리의 비밀스러운 멜로디를요. 부디 이 노래가 당신의 밤에 닿아, 길을 잃지 않도록 이정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은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저희의 이름은 서로에게 ‘별’과 ‘바다’였지만,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그 어떤 밤하늘보다 빛나는 당신의 내일을 응원합니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입니다.”
별은 직접 선곡 버튼을 눌렀다. 스튜디오에는 익숙한 듯 낯선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 두 사람의 약속이었고,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맞춰주는 마법이었다. 별은 헤드폰을 벗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지만, 입가에는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라디오 부스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오늘따라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듯했다. 밤하늘의 별들이 그녀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 괜찮아.’
방송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별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녀의 심장은 쿵쿵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편지가 그녀에게 보낸 신호라면, 그녀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별은 흐르는 노래를 들으며, 창밖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 별들 중 하나가, 마치 바다의 눈빛처럼 그녀를 주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이 밤은, 다시 시작될 이야기의 서막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