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달빛이 아스테리아 마법 학원의 뾰족한 첨탑 위로 길게 드리워진 밤이었다. 고요함 속에서도, 고서들이 잔뜩 쌓인 도서관 깊숙한 곳에서는 은은한 빛의 구슬이 흔들리며 미약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아래, 은채는 마법사라면 누구든 알 법한 고대 마법의 서적 ‘아케인 잊힌 주문’을 펼쳐놓고 있었다.
“하아… 역시, 여기에도 없어.”
낮게 한숨을 쉬며 은채는 페이지를 넘겼다. 금빛 실로 수놓인 낡은 가죽 표지 아래, 수천 년 전의 비밀이 잠들어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녀가 찾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며칠 전, 지하 4층의 폐쇄된 실험실 구역에서 들려왔던 기이한 속삭임. ‘이리나’라는 이름을 부르던 그 희미한 목소리는 은채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학원의 역사서나 금지된 마법에 대한 기록 어디에도 ‘이리나’라는 이름이 관련된 어떤 끔찍한 금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때였다. 책장 틈새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낡고 바랜 양피지 조각이었다. 은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금지된 구역’에 분류되어 교수들의 허가 없이는 열람조차 불가능한 책이었다. 그런 책 속에 이런 것이 끼어있을 리가.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희미하게 그려진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대략적인 학원의 지하 구조도 같았는데, 현대의 어떤 지도에서도 본 적 없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었다. 특히, 지하 4층 실험실 구역의 가장 깊은 곳, 철저히 봉인된 ‘제7구역’이라고 알려진 그곳에서 더 아래로 이어지는 듯한 통로가 흐릿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통로 옆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곳은 결코 열어선 안 될 문… 어둠이 빛을 삼키는 곳. 영원의 고통만이…」*
은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리나’라는 이름,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지도와 경고문. 직감적으로 무언가 엄청난 것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교수들은 그 어떤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아니, 이야기하지 *못*하게 막혀있는 듯했다.
“젠장, 결국 내가 직접 가봐야 한다는 거잖아.”
결심한 듯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빛 구슬을 손에 쥐자 은은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비장함과 함께 미약한 두려움이 스쳤다. 학원의 가장 밑바닥, 금지된 구역의 심연 속으로.
***
고요한 복도에 은채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지하 4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차갑고 무거워졌다. 벽에 희미하게 박힌 야광석들마저 마치 숨을 죽인 듯 침묵하고 있었다. 익숙한 마법의 기운 대신, 끈적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그녀의 피부를 감쌌다. 부패한 흙냄새와 함께, 희미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제7구역.’
거대한 철문 앞, 은채는 빛 구슬을 높이 들었다. 육중한 문은 녹슬고 닳아 있었지만, 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복잡한 마법 봉인 문양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웬만한 대마법사라도 쉽사리 풀지 못할 수준의 봉인. 그러나 은채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양피지 지도의 가장자리, 작고 희미하게 그려진 마법진. 그건 단순한 봉인 해제 주문이 아니었다. 봉인을 *속이는* 마법이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에 푸른 마력을 모았다. 정교하게, 마치 수를 놓듯, 봉인 문양 위에 마력의 실타래를 그려나갔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단 한 치의 오차라도 발생하면 모든 마법이 역류하여 그녀 자신을 덮칠 터였다. 몇 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쉬이이익…*
마지막 마법진이 완성되자, 철문의 봉인 문양에서 푸른 빛이 스치듯 번개처럼 일렁였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거대한 철문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확 몰려왔다. 은채는 빛 구슬을 더 강하게 빛냈다. 문이 열린 공간은 복도가 아니었다. 넓고 텅 비어 있는 원형의 공간. 그리고 그 중앙에는 돌로 된 거대한 원형 제단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제단 표면은 알 수 없는 액체로 얼룩져 있었고, 기분 나쁜 광택을 내고 있었다.
주변 벽면에는 수많은 마법진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생명력을 흡수하고, 영혼을 구속하는 듯한 불길한 마법진들. 은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공간은… 실험실이 아니었다. 어떤 의식(儀式)을 위한 장소였다.
그때, 제단 뒤편의 벽에서 이질적인 돌출부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벽과는 확연히 다른, 검고 거친 재질의 돌. 그리고 그 위에 조각된,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문양.
그것은 학원의 상징인 ‘영원의 눈’ 문양이었다. 그러나 학원의 상징과는 다르게, 이 문양은 눈동자 안에 끔찍한 균열이 가 있었다. 마치 눈물이 흐르다 굳은 듯한 검은 자국이 주변을 더럽히고 있었다.
은채는 그 균열 속으로 손을 뻗었다. 차갑고 미끄러운 감촉. 마치 무언가 살아있는 것처럼 피부에 닿는 느낌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콰르르릉!*
갑자기 벽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출부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천천히 옆으로 밀려났다. 그 뒤에서 나타난 것은 복도가 아니었다. 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계단이었다. 양피지 지도에 그려져 있던, ‘제7구역’ 아래의 ‘그곳’이었다.
“설마… 지하 5층이…?”
그녀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계단 아래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잊힌 등불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빛과 함께, 다시금 그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나… 도와줘… 제발…”*
은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누군가 정말로 저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 끔찍한 공간의 심연 속에서, 도움을 바라는 목소리가.
“거기 누구야?!”
그녀가 외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만 차가운 어둠과, 희미한 빛의 깜빡임, 그리고 더욱 선명해진 비릿한 냄새만이 그녀를 덮쳐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은채는 빛 구슬을 더욱 단단히 쥐고 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 위로, ‘제7구역’의 육중한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닫히기 시작했다. *철컥!* 거대한 문이 완전히 닫히자, 공간은 다시 절대적인 침묵 속에 잠겼다. 오직,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은채의 빛 구슬만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리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스테리아 마법 학원의 가장 깊은 곳, 감춰진 어둠이 이제 막,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