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4호의 밤
김현수는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1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 끝 1304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벽지 냄새가 섞인 공기가 그를 맞았다. 좁지만 그래도 나만의 공간. 현수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생각했다. 오늘도 별것 없는 하루였다. 직장 상사의 잔소리, 끝없이 밀려드는 서류 더미, 그리고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결국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운 것까지. 완벽하게 무미건조한 쳄바퀴 속 삶이었다.
그는 현관에 가방을 던져두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인스턴트 커피 한 잔으로 남은 밤을 버틸 요량이었다. 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달그락. 순간, 손에서 미끄러진 스푼이 씽크대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수는 ‘젠장, 피곤해서 손이 미끄러졌군.’ 하고 중얼거리며 스푼을 주웠다. 딱히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사소한 일들은 일상다반사였다.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드라마는 여느 때처럼 고구마 같은 전개를 이어가고 있었고, 현수는 무념무상으로 채널을 돌렸다. 뉴스, 다큐멘터리, 또 다시 드라마. 돌리고, 돌리고… 텅 빈 시선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이 살짝,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미끄러졌다. 현수는 눈을 비볐다. ‘착각인가? 아니면 이 테이블이 수평이 안 맞나?’ 그는 리모컨을 제자리에 되돌려놓고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툭툭 쳐봤다.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잠시 눈이 침침해서 그랬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 밤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새벽 두 시, 침대에 누워 뒤척이던 현수는 잠결에도 무언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긁는 소리였다. 사각사각, 드르륵. 마치 부엌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벽을 긁는 듯한 소리. 처음엔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나는 소리려니 했다. 이 아파트는 방음이 워낙 개판이었으니까. 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지고, 마치 자신의 부엌에서 나는 듯 가까워졌다.
현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엌으로 향하는 복도를 따라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삐걱이는 마룻바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부엌에 다다르자, 소리는 뚝 멎었다. 현수는 플래시를 이리저리 비춰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씽크대 위, 냉장고 옆, 심지어 식탁 밑까지 확인했지만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너무 피곤했나.”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헛것을 들은 거라 치부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 침대에 걸터앉으려는 찰나, 등 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현수는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돌아서보니, 침대 머리맡 작은 선반에 꽂혀있던 두꺼운 전공 서적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책이 떨어지면서 낸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컸다. 그리고… 방금까지 분명히 세로로 꽂혀 있던 책이었다. 밀어내지 않고서는 절대 저절로 떨어질 수 없는 각도였다.
현수는 등골에 차가운 물줄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차가웠다. 마치 오랫동안 한겨울 바깥에 방치된 물건처럼.
“누구… 누구야?”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고 떨려서, 그 자신이 듣기에도 기이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넓은 아파트에 현수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방을 둘러봤다. 닫혀있는 문, 굳게 잠긴 창문. 대체 누가? 어떻게?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커녕 눈꺼풀조차 감을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고음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침실 한쪽 벽에 붙어있는 붙박이장에 고정되었다. 삐걱- 아주 느리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현수는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잠그고 잤던 옷장 문이었다. 서서히 벌어지는 틈새로 어두운 옷장 내부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저 옷가지들만 걸려있을 뿐.
끼이익… 쾅!
옷장 문이 활짝 열리는가 싶더니, 굉음을 내며 닫혔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여있던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들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작은 장식품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방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젠장! 대체 뭐야! 귀신이라도 붙었어? 나가! 당장 나가!”
현수는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섬광이 터지듯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자신의 낡고 좁은 침실이 아니었다.
드넓은 평원,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고, 익숙하지 않은 두 개의 달이 붉고 푸른빛을 뿜으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바람 소리는 그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도 웅장했고, 흙냄새는 이질적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언어의 울림, 그리고 짙은 안개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한 쌍의 붉은 눈동자.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형체, 섬뜩한 힘, 그리고 현수의 존재의 심층을 뒤흔드는 강력한 기시감. 마치 오래전 잃어버렸던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오는 듯한 압도적인 연결감이 그를 덮쳤다.
‘이건… 꿈이 아니야.’
그 붉은 눈동자가 현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것은 현수에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니, 현수를 통해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했다. 그 존재의 압도적인 힘에 휘둘리자, 아파트의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더욱 격렬해졌다. 방안의 모든 물건들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창문이 와장창 깨지며 차가운 밤공기가 들이닥쳤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힘이 그를 덮쳤다.
현수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그의 정신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현상이, 저 멀고 먼 이세계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불가능한 확신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현수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방 안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깨진 유리 조각, 박살 난 컵, 기울어진 액자들. 차가운 밤바람이 창문으로 불어와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현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피곤함도, 짜증도 없었다. 오직 순수한 공포와, 자신이 방금 경험한 것이 현실이라는 섬뜩한 인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세계의 파편만이 가득했다. 그의 평범한 삶은, 1304호의 기이한 밤과 함께 완전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대체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왜, 그것이 자신을 찾아온 것인가. 현수는 차갑게 식어가는 방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