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고요한 도시. 아니, 고요함이라기보다 숨죽인 정적에 가까웠다. 대성당 꼭대기에 걸린 거대한 시계탑이 째깍이며 자정을 알렸다. 그 종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웅장하고 신성했지만, 오늘 밤만큼은 핏빛 예고처럼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이 대성당 내부를 신비롭게 밝혔다. 붉은 카펫이 깔린 긴 통로의 끝, 황금빛 제단 위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완벽했다. 서하. 눈부신 은빛 드레스는 그녀의 우아한 자태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머리 위를 장식한 순백의 월계관은 그녀가 이 도시의 수호자임을 만방에 선포하는 듯했다. 군중의 환호성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하 님! 위대한 빛의 수호자 서하 님께 영광을!”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서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경외와 사랑, 숭배가 담긴 눈빛들. 그래,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은 영광.
그때였다.
콰아아앙!
대성당의 육중한 문이 산산조각 나며 굉음을 냈다. 찢겨나간 나무 파편들이 칼날처럼 흩뿌려지고, 굳건했던 대리석 기둥에는 마치 거대한 손톱으로 긁은 듯 깊은 균열이 생겼다. 쏟아져 들어온 것은 차가운 밤공기만이 아니었다. 어둠, 짙고 농밀한 어둠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대성당 안을 휘감기 시작했다.
환호성에 젖어 있던 군중의 얼굴에서 일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경악과 혼란이 교차하는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침입자다!”
서하의 미소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눈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녀는 즉시 빛의 방패를 소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냐!”
어둠의 장막이 제단 앞까지 순식간에 드리워졌다. 그 안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망토, 그림자처럼 짙은 머리카락, 그리고 번개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속에는 거대한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렸다.
서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방패를 든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은아…?”
목소리에는 의심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존재. 영원히 사라졌다고 믿었던 그림자가, 이렇게 현실로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은아는 대답 대신 비웃음 같은 미소를 흘렸다. 서하의 두려움이 그녀에게는 달콤한 승리감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서하.”
그녀의 목소리는 생전의 은아와 달랐다. 투명하고 맑았던 음색은 사라지고, 얼음처럼 차갑고 쇳소리가 섞인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서하가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네가 왜… 네가 어떻게 여기… 살아있을 리가 없어. 그때 분명히…!”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은아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던 그때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모든 빛을 빼앗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아버렸던 그 순간이.
“죽었어야 했지. 네 계획대로라면.”
은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지만 난 돌아왔어. 네가 쌓아 올린 이 모든 거짓을 무너뜨리기 위해.”
서하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환상의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특기.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현혹하는 달콤한 환상의 노래.
“여전히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네가 빛을 잃고 사라진 후에도 이 도시는 평화로웠다. 내가 수호했으니까! 너 같은 어둠은… 내 빛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서하의 주변에서 피어오르던 빛이 거대한 장미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 빛은 주변 군중들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다시 경외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은아를 향해 분노에 찬 시선을 보냈다.
“저 어둠을 물리쳐라!”
“빛의 수호자님을 방해하지 마!”
은아는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숨을 쉬는 듯했다.
“아직도 그런 시시한 속임수에 의존하다니. 변한 게 없구나, 서하.”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실타래처럼 엮여 나오더니, 서하를 향해 쏜살같이 뻗어나갔다. 촤아아악!
그림자 촉수는 서하의 환상 장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꿰뚫었다. 투명한 빛의 꽃잎들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환상 마법은 은아의 그림자 앞에서 속절없이 부서졌다. 군중들의 눈에 서서히 혼란이 되돌아왔다.
“크윽!”
서하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은아의 힘이 예전과 너무나 달랐다. 빛을 다루던 과거의 은아는 사라지고, 이제는 어둠 그 자체가 되어 나타난 듯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은아의 그림자에서 강력한 힘을 느꼈다. 과거의 은아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위험한 힘을.
은아가 한 걸음, 한 걸음 서하에게 다가섰다. 발걸음마다 그림자가 바닥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네가 빼앗아 간 건 단순한 힘이 아니었어. 내 이름, 내 명예, 내 모든 것을 짓밟았지.”
은아의 목소리가 대성당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군중들은 공포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지만 난 살아남았어. 네가 버렸던 그 어둠 속에서. 네가 멸시했던 그 절망 속에서.”
은아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어둠이 실체화되어 날카로운 낫처럼 변했다. 낫의 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서하가 온몸으로 떨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단에게 외쳤다.
“무엇을 하느냐! 저 악마를 당장 제압해라!”
무장한 기사들이 창을 들고 은아에게 달려들었다. 갑옷의 철컹거리는 소리가 대성당을 채웠다.
하지만 은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의 낫이 가볍게 한 번 휘둘러지자, 기사들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그림자들이 기사들의 발목을 칭칭 감더니, 그들을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기사들은 허공에서 버둥거렸지만, 그림자 구속은 마치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이게… 무슨…”
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아의 힘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기사단마저 저렇게 손쉽게 제압당하다니.
은아는 서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씩 빼앗아 갈 거야.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낫이 서하가 앉아있던 황금빛 제단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대로 낫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검은 낫이 제단을 스쳐 지나가자, 황금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한가운데에 깊은 검은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이내 제단을 완전히 두 동강 내버렸다. 굉음과 함께 제단이 무너져 내렸다. 파사삭!
파괴된 제단 위, 서하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월계관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순백의 월계관은 어둠에 잠식된 듯 검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서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다.
은아는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서하에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네가 누리는 모든 영광이, 네가 훔쳐간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산산조각 나는지 똑똑히 지켜봐. 서하.”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어둠의 장막이 다시 그녀를 감쌌고, 은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성당 안에는 파괴된 제단과 공포에 질린 군중, 그리고 무너진 월계관의 잔해만이 남았다. 서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은아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네가 누리는 모든 영광이, 네가 훔쳐간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산산조각 나는지 똑똑히 지켜봐.*
그녀는 깨달았다. 은아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지옥 그 자체였다.
완벽했던 그녀의 세상이, 이제 막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