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파도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검은 모래사장에 부딪혔다. 한지훈은 낡은 외투 깃을 올리며 차창 밖 풍경을 응시했다. 지난 밤 꿈에 나타난 은서의 미소는 너무나 선명하여,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가슴 저릿한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손에 쥐어진 낡은 사진 한 장. 해맑게 웃는 은서의 뒤로 펼쳐진 푸른 바다와 작은 어촌 마을의 풍경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사진 뒤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동해리, 그 여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동해리’는 지도상으로는 평화로운 작은 어촌 마을이었으나, 지훈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이미 시간의 흔적이 깊게 배어있는 고즈넉한 풍경뿐이었다. 20년 전의 은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곳에 머물렀을까. 지훈은 낡은 마을 안내판을 지나 익숙지 않은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굽이진 골목길 끝에, 낡은 목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은서가 입고 있던 빛바랜 티셔츠의 색깔과 닮은, 옅은 하늘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이었다. ‘푸른 파도 미술 공방’이라는 간판이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지훈은 심장이 터질 듯한 두근거림을 애써 진정시키며 공방 문을 두드렸다. 나무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안은 먼지로 가득했고, 낡은 이젤과 물감 자국이 선명한 작업대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멈춘 듯, 스케치북 한 권이 펼쳐진 채 그대로 있었다. 얇은 종이 위에는 거친 파도와 갈매기들이 자유롭게 그려져 있었다. 지훈의 눈에 익숙한 필체였다. 은서의 것이었다.
그녀의 숨결이 닿았던 공간.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풍경. 지훈은 천천히 공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는 수십 년 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대부분은 이름 모를 풍경화나 인물화였지만, 그 중 몇몇은 은서의 작품인 것을 지훈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색채, 그리고 슬픔을 머금은 듯한 인물의 눈빛. 그의 손이 떨렸다.
“누구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칠십은 넘어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가 허리에 손을 얹고 지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한지훈이라고 합니다. 이 공방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지훈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지훈을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공방은 폐쇄된 지 오래여. 빈 집이나 다름없으니 들어가면 안 되지.”
“혹시 이곳에서 오래전에 그림을 그렸던… 은서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한은서라고, 서른 살 정도 되는 여성인데…”
지훈의 말에 할머니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은서? 그 이름은 참으로 오랜만이구먼. 어인 일로 그 사람을 찾는 게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은서의 사진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꺼내 들고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맞아, 이 아이. 참 예쁘고 밝았지. 그림도 얼마나 잘 그리던지. 한동안 이 마을에서 지냈었어. ‘푸른 파도’ 공방의 마지막 주인이었지.”
지훈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단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은서 씨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렀는지 아시는지요? 혹시 연락처 같은 걸 남기지는 않았나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떠난 이유도, 어디로 갔는지도 아무도 몰라. 그냥… 급하게 떠나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던 것 같았지.”
“급하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글쎄. 딱히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그 아이 표정이 늘 뭔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였어. 밤마다 바닷가를 거닐며 혼자 생각에 잠기는 모습도 자주 봤고. 아, 그래. 그때 종종 찾아오던 남자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잊었던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요? 혹시 이름이라도…”
“어허,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해. 늘 검은 옷을 입고 왔던 것만 기억나. 서울에서 왔다고 했던가. 은서가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얼굴이 어두워졌어. 그 남자가 다녀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서도 사라졌지.”
새로운 인물의 등장. 지훈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은서가 이곳에 머물던 동안, 그녀를 찾아왔던 의문의 남자. 그리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사라짐.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떠났다는 할머니의 증언은 지훈의 불안감을 더욱 키웠다.
“할머니, 혹시 그 남자가 은서 씨에게 어떤 물건을 가져다주거나, 아니면 은서 씨에게서 받아간 것이 있었나요?” 지훈은 문득 공방 한쪽에 놓인 낡은 캐비닛을 가리켰다. 캐비닛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할머니는 캐비닛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하지만 은서가 떠나기 전에 저기 안에 무언가를 숨기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아주 소중한 거라고 했지. 그리고… 그 남자가 다녀간 날, 은서가 평소와 다르게 무척 초조해 보였어. 그림을 그리는 손도 덜덜 떨렸고. 그날 밤, 은서는 한밤중에 마을을 떠났지.”
지훈은 할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캐비닛 앞으로 다가갔다. 잠금장치는 낡았지만 튼튼해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공구들을 꺼냈다.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지훈은 능숙한 손길로 잠금장치를 조작했다. 짤칵,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안에는 몇 권의 낡은 스케치북과 함께, 작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위에는 은서의 이름이 예쁘게 새겨져 있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편지 뭉치와 함께, 작은 인형 하나, 그리고 오래된 금색 열쇠가 들어 있었다. 열쇠는 어딘가에 숨겨진 또 다른 문을 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편지 뭉치 중 가장 위에 있는 봉투를 뜯었다. 은서의 필체로 쓰여진 글들이 지훈의 눈에 들어왔다.
지훈에게,
만약 이 편지를 네가 읽고 있다면, 나는 아마 아주 먼 곳에 있겠지. 아니면… 너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미안해. 널 떠났던 그 날처럼, 이번에도 나는 급하게 떠나야만 해. 누군가 나를 찾아왔어. 내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야.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아. 이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이… 언젠가 네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 모든 진실은 저 열쇠가 가리키는 곳에 있어. 부디… 안전하렴. 그리고 나를 잊어줘.
지훈의 손에서 편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은서는 그가 찾아 헤맨 지난 세월 동안, 그를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숨겼던 것인가. 그녀를 쫓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가 가진 무언가를 빼앗으려 했다는 것. 그리고 이 금색 열쇠가 가리키는 ‘진실’은 또 무엇인가. 지훈은 상자 안에 있는 금색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은서의 편지에 담긴 슬픔과 절박함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때, 공방 밖에서 낯선 차 한 대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색 세단이었다.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창밖을 가리켰다. “어머나, 저 차는… 그 사람 차랑 똑같이 생겼네.”
지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고, 그림자처럼 드리운 한 남자의 실루엣이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시선은 곧장 열려 있는 캐비닛을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첫사랑이 감춰왔던 비밀의 조각들이 드디어 맞춰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