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또 비냐. 제로는 낡은 후드 아래로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네오 서울의 장마는 끝없이 이어지는 잿빛 절망과도 같았다. 고층 빌딩 숲 위로 쏟아지는 인공 비는 지상으로 떨어질수록 끈적한 산성 진흙으로 변해 언더시티의 철골 구조물들을 부식시켰다. 낡은 금속과 썩어가는 전선의 퀴퀴한 냄새가 습기와 뒤섞여 숨통을 조여왔다.
제로는 눅진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낡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한 태블릿을 꺼냈다. 액정 위로 발주된 작업 목록이 깜빡였다. ‘구획 7, 폐쇄 서버 룸 – M-코어 회수.’ 젠장, 구획 7이라고? 거긴 도시 전설급으로 위험한 곳인데. 시스템 고스트가 출몰하고, 미아가 된 AI들이 폐기된 사이버네틱스와 뒤엉켜 기괴한 의식을 치른다는 소문이 파다한 곳. 게다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인간의 흔적은 수십 년 전이었던가.
“거래가 너무 좋잖아.” 제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위험 고수익. 항상 그랬다. 이번에 주는 크레딧이라면 이 썩어가는 캡슐형 주거지에서 벗어나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향상된 임플란트 몇 개를 더 달고 이 지옥 같은 삶에서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테지.
제로는 닳아빠진 부츠를 끌며 구획 7으로 향하는 지하 통로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녹슨 철문은 육중한 굉음을 내며 열렸고, 그 안쪽은 빛 한 줄기 없는 심연이었다. 제로의 왼쪽 눈에 박힌 시야 확장 임플란트가 가동되며 어둠 속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냈다. 폐쇄된 통로 저편에서 웅웅거리는 저음의 기계음이 들려왔다.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가는 기계들의 마지막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수많은 전선 다발이 거대한 뱀처럼 천장과 벽을 타고 기어 다녔다. 일부는 끊어져 시퍼런 불꽃을 튀기며 섬뜩한 빛을 발했다. 제로는 능숙하게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십 년간 켜켜이 쌓인 먼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구름을 만들었다. 목적지인 폐쇄 서버 룸은 통로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침내 거대한 이중 잠금 장치가 달린 강철 문 앞에 섰다. 시스템은 이미 죽어 있었지만, 물리적인 잠금은 여전히 강력했다. 제로는 손목에 달린 멀티툴을 꺼내 미세한 틈새에 박아 넣었다. 찌르르, 하는 전자음과 함께 보안 패널이 열렸다. 얽히고설킨 칩과 전선들이 드러났다.
“빌어먹을, 이건 또 뭐야.” 제로는 한숨을 쉬었다. 예상보다 오래된 시스템이었다. 태블릿을 꺼내 해킹 시퀀스를 주입했다. 디지털 코드들이 화면 위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문은 묵묵부답이었다. 수십 년간 고립된 시스템은 외부의 어떤 간섭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강력한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젠장, 이런 식으로는 밤새도 안 되겠는데.” 제로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제로의 시야 임플란트가 벽의 한 부분을 스캔했다. 다른 금속과 확연히 다른, 검고 매끄러운 질감. 무언가 새겨진 듯한 희미한 문양이 보였다. 벽 전체를 뒤덮은 녹과 먼지 속에서 유일하게 깨끗하고 이질적인 부분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제로는 조심스럽게 문양에 손을 댔다. 금속이 아니었다. 차가운 돌과 같았다. 손끝에 닿는 순간, 정전기처럼 찌릿한 무언가가 온몸을 관통했다. 동시에 제로의 시야 임플란트가 비명을 지르듯 강렬한 백색광을 뿜어냈다.
**지이이잉-**
온몸의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왼쪽 눈의 시야 임플란트는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했고, 팔의 근력 보조 장치는 제멋대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강렬한 쾌감,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정보의 폭주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이 문양의 흐름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문양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쉬이이잉-**
육중한 강철 문이 거짓말처럼 천천히 열렸다. 녹슨 경첩이 삐걱이며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공간의 비밀을 드러냈다. 안쪽은 바깥보다 훨씬 더 넓고, 기묘하게도 깨끗했다. 먼지 한 톨 없는 거대한 원형 공간. 한가운데에는 검고 매끄러운 거대한 기둥이 솟아 있었다. 흡사 거대한 흑요석 수정 같기도 하고, 혹은 끝없이 깊은 어둠을 응축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기둥 표면에는 제로가 방금 만졌던 것과 똑같은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뭐야, 이거.” 제로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블릿 스캐너를 들어 올렸지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아니, 감지는 되는데, 알 수 없는 오류 코드만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주파수, 측정 불가능한 에너지, 이해할 수 없는 데이터 패턴.
제로의 눈은 기둥에 고정되었다. 녀석은 살아있는 것 같았다. 아니, *숨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흐름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웅웅거리고 있었다. 제로는 넋 나간 사람처럼 기둥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통제도 없이, 그저 본능에 이끌려.
손바닥이 검은 기둥에 닿았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 찌릿했던 아까와는 다른, 거대하고 무형의 에너지가 온몸을 감쌌다. 제로의 뇌리에 수많은 정보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디지털 데이터가 아니었다. 이미지도, 소리도 아니었다.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우주적인 이해. 만물의 근원적인 흐름, 생명의 파동, 물질의 본질. 도시의 모든 전선 속에서 흐르는 전류가 보이는 듯했고, 빌딩의 강철 구조물 안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입자들이 느껴지는 듯했다. 숨 쉬는 공기의 흐름, 저 멀리 지하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제로의 시야 임플란트가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사물들의 윤곽선이 희미하게 빛나고, 공중에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에너지가 아른거렸다. 마치 세상이 거대한 신경망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제로의 태블릿이 갑자기 강한 전자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기둥에서 새어 나온 푸른빛이 태블릿의 깨진 액정을 감쌌다. 액정 위로 무의미한 오류 코드 대신, 기묘한 문양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양들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갑자기 태블릿이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액정의 균열이 사라지고, 시스템은 마치 공장에서 갓 출고된 것처럼 깨끗하게 재부팅되었다.
“이게… 뭐야.” 제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해킹 도구도, 수리 도구도 없이, 그저 ‘접촉’과 ‘의지’만으로 기계가 치유되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었다. 기술도 아니었다.
‘근원석’.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생명의 흐름을 잇는 자, 왜곡을 바로잡을 자.’
제로가 손을 뻗어 부서진 통신 패널을 만졌다. 폐쇄 서버 룸의 입구 옆에 있던, 고장 난 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패널이었다. 패널에 새겨진 문양을 떠올리며, 제로는 태블릿을 고쳤을 때의 그 ‘흐름’을 재현하려 애썼다. 집중했다. 에너지의 흐름, 연결.
**지직-**
통신 패널의 전원등이 깜빡이며 녹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낡고 지직거리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시스템 재가동 중… 외부 신호 감지… 위험…”
제로가 손을 떼자 패널은 다시 먹통이 되었다.
“젠장.” 제로는 이마를 짚었다. M-코어 회수는 완전히 잊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 기이한 현상에 비하면 M-코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근원석’이라는 것과 자신이 얻은 이 능력. 이것은 언더시티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세상의 어떤 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바깥 통로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곧이어 시스템 경보음이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외부 신호 감지? 위험?” 제로는 통신 패널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근원석을 활성화시키고 패널을 만진 것이 도시의 감시 시스템에 포착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이 구획 7을 건드린 것 자체가 위험한 도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콰아앙! 구획 7의 입구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들은 이미 진입했다.
“젠장, 이 속도는 뭐냐.” 제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M-코어를 회수하려던 평범한 도굴꾼에게 이렇게까지 빠르게 대응할 리 없었다. 그들은 근원석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이 구획 7이 그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던가?
제로의 시야 임플란트가 다시 한번 이 공간의 에너지 흐름을 분석했다. 근원석에서 뻗어 나가는 푸른 빛줄기가 보였다. 그것은 이 서버 룸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심지어는 바깥 통로까지 미미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냥 돌덩이가 아니었다. 거대한 네트워크, 혹은 에너지의 ‘문’ 같은 것이었다.
제로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근원석의 힘을 이용하면, 이 시스템을… ‘재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달려오는 발소리와 기계음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몇 초 안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제로는 다시 한번 근원석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에너지의 흐름.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 제로는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만지는 것을 넘어, 근원석과 자신을 연결하려는 듯 깊이 집중했다.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이 공간의 모든 전선과 회로, 그리고 저 바깥의 추격자들까지 상상했다. 그리고 하나의 ‘의지’를 주입했다.
**파앗!**
근원석에서 강렬한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제로의 온몸이 빛에 휩싸였다. 사이버네틱 임플란트가 일제히 미친 듯이 진동하며 과부하 경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제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 세상은 푸른색과 검은색의 에너지 흐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멀리 달려오던 무장한 경비 로봇들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이들의 시야 임플란트에 과부하가 걸린 듯, 눈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로봇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벽에 부딪히거나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로가 이전에 만졌던 통신 패널에서 또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하고 힘찬 음성이었다.
“외부 시스템 해제 완료. 구획 7 비상 탈출 통로 가동. 30초 후 폐쇄.”
제로의 시야 임플란트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녹색 선이 빛나기 시작했다. 바닥을 따라 희미하게 이어지는 선이었다. 탈출 통로!
“고맙다, 이 빌어먹을 돌덩어리!” 제로는 근원석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닥의 녹색 선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로봇들의 파열음과 인간 경비병들의 고함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제로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언더시티의 고철 도굴꾼이 아니었다. 손끝에서, 아니, 온몸에서 느껴지는 이 알 수 없는 힘.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기술의 정점인 사이버네틱 도시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고대의 마법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 마법은 이제 제로의 심장과 함께 뛰고 있었다.
이 도시가 감추고 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 힘을 발견한 제로는, 과연 무엇을 하게 될까?
제로의 등 뒤로 구획 7의 육중한 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이제 그는 미지의 힘을 가진 채, 도시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었다. 세상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고 제로 역시, 더 이상 예전의 제로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