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황혼골을 휩쓸었다. 갈대밭은 뼈마디 시린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저물어가는 해는 붉은 피를 토하듯 서산 너머로 스러지고 있었다. 마을 외곽, 겨우 세워진 허름한 오두막 지붕 위로 눈발이 날렸다. 작년에는 이토록 빨리 눈이 내리진 않았었다. 아마 올해는 더 지독한 겨울이 올 모양이었다.
카인은 묵직한 도끼를 어깨에 멘 채 마을로 향했다. 빈손이었다. 꼬박 반나절을 산속을 헤맸지만, 작은 산토끼 한 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발자국만 간신히 찾았을 뿐, 제국의 강제 징발로 인해 산짐승들마저 씨가 마른 듯했다. 그의 낡은 가죽 옷깃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고단한 한숨을 절로 불러냈다. 배가 고팠다. 아니, 이 마을의 모두가 배를 곯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몇 안 되는 집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가늘고 약했다. 땔감마저 귀해진 탓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귓전을 때렸다.
“카인아, 오늘은 어땠냐?”
마을 회관 격인 낡은 창고 앞에서 할매 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은 깊은 수심으로 가득했고, 앙상한 손에는 솥에 눌어붙은 보리죽 찌꺼기가 담긴 나무 그릇이 들려 있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영 좋지 않았습니다, 할매. 사냥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춘자 할매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러다간 다들 굶어 죽겠다. 어제는 길남이네 막내가 결국… 에휴.”
카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길남이네 막내는 이제 겨우 네 살이었다. 며칠 전부터 열병을 앓았고, 먹을 것이 없어 기력을 차리지 못했다. 어제 새벽,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제국이 거둬간 식량과 약재들이 마을에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제국의 탐관오리들이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국 놈들은… 정말.” 카인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분노가 서렸다.
춘자 할매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말조심해라, 카인아.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너까지 당한다.”
그녀의 말에 카인은 억눌린 분노를 삼켰다. 분노는 독이 되어 심장을 갉아먹는 듯했다. 흑요 제국. 끝없이 팽창하여 대륙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거대한 제국은 그 영토의 구석구석까지 그들의 철혈 통치를 뻗치고 있었다. 황혼골 같은 작은 마을은 그들에게 한낱 먼지보다 못한 존재였지만, 세금을 거둬가는 손길만큼은 가차 없었다.
그날 저녁, 마을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겼다. 배고픔과 슬픔이 뒤섞인 침묵이었다. 카인은 그의 오두막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감자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계속 버틸 수 있을까? 다음 달이 되면 또 세금을 걷으러 제국 병사들이 들이닥칠 터였다. 남아있는 곡식은 거의 없었고, 가축은 진작에 팔거나 잡아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그리고 이내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황혼골의 침묵을 갈랐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국 병사들이었다.
“젠장, 벌써?!”
카인은 도끼를 움켜쥐었다. 매달 정해진 날짜가 아닌데. 왜 지금?
병사들은 마을 한복판으로 거칠게 들어섰다. 붉은 제복과 번쩍이는 강철 갑옷은 횃불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그들의 선두에는 키 크고 위압적인 체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갑옷에는 흑요 제국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대위 베릭. 황혼골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은 이름이었다.
“촌장! 나오지 못할까!” 베릭 대위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감히 제국의 명을 거역하고 세금을 체납했느냐?!”
마을 촌장이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늙고 병색이 완연한 촌장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베릭 대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 대위님… 저희는 지난달에 이미…”
“시끄럽다!” 베릭 대위가 촌장의 뺨을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촌장의 얼굴이 돌아갔다. “추가 징발이다! 황제 폐하의 대업을 위해 더 많은 물자가 필요하다! 당장 이 마을의 모든 곡식과 가축을 내놓아라!”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모두가 텅 빈 창고와 앙상한 가축들을 떠올렸다.
“대위님… 더 이상 낼 것이 없습니다…” 촌장이 울먹이며 빌었다.
베릭 대위는 비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차가운 칼날이 촌장의 목에 닿았다. “허튼소리 하지 마라. 너희 같은 개돼지들이 숨겨놓은 것이 없을 리 없다. 당장 수색해라! 한 톨의 곡식이라도 발견되면, 이 늙은이의 목을 쳐라!”
병사들이 들이닥쳐 각 가옥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쇠스랑과 몽둥이로 벽을 부수고, 낡은 가구들을 뒤엎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카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의 발길이 자신의 오두막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안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감자 몇 알뿐이었다.
한 병사가 춘자 할매의 오두막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손에는 낡은 자루가 들려 있었다. 자루 안에는 겨우 한 됫박 정도의 쌀이 들어 있었다. 춘자 할매가 기어이 다음 해 농사를 위해 숨겨둔 씨앗용 쌀이었다.
“이거다! 숨겨놓은 곡식이 나왔습니다, 대위님!” 병사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춘자 할매가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왔다. “안 돼! 그건 안 돼! 그건 다음 해에 심어야 할 씨앗이란 말이야! 그거마저 가져가면 우리 모두 굶어 죽어!”
베릭 대위는 춘자 할매의 발악을 비웃으며 손짓했다. 병사들이 할매를 붙잡고 거칠게 밀쳤다. 할매는 나뒹굴었다. 그때, 베릭 대위의 눈에 마당 한켠에 놓인 작은 수레가 들어왔다. 수레 위에는 춘자 할매가 아끼던, 이제는 낡아 빠진 나무 인형이 놓여 있었다. 할매의 돌아간 손녀딸이 남긴 유일한 것이었다.
“흥, 씨앗? 씨앗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따위 쓸데없는 나무 쪼가리를 아끼면서 곡식은 없다고?” 베릭 대위는 발로 수레를 걷어찼다. 나무 인형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안 돼! 내, 내 손녀딸의…!” 춘자 할매가 울부짖으며 조각난 인형을 향해 기어갔다.
그 순간, 카인의 눈에서 이성이 끊어지는 듯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길남이네 막내의 싸늘한 시신, 촌장의 터진 뺨, 그리고 이제는 춘자 할매의 유일한 희망마저 짓밟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죽는다. 결국, 저들은 이 마을을 텅 비게 만들고, 우리 모두를 말라 죽일 것이다.
카인은 손에 든 도끼를 꽉 쥐었다. 그의 눈은 불타올랐다.
“멈춰라…!” 그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베릭 대위가 고개를 돌려 카인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이 보잘것없는 촌뜨기가 감히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이냐?”
병사들이 카인에게 달려들었다. 카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동안 사냥하며 단련된 몸놀림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온 병사의 몽둥이를 피하고,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던졌다. 병사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베릭 대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흥미롭군. 이 쥐새끼 같은 마을에도 발톱을 드러내는 놈이 있나.”
카인은 숨을 헐떡이며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더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죽일 셈이냐!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모두 죽을 것이다!”
그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눈동자에 희미한 불꽃이 피어나는 것을 카인은 보았다.
베릭 대위가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좋다. 감히 제국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자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마!”
병사들이 카인에게 달려들었다. 카인은 도끼를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사 하나가 쓰러졌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두려웠지만, 분노가 그 두려움을 집어삼켰다.
“가만히 있지 마라!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싸워야 산다!”
카인의 외침은 절규이자 선언이었다. 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촌장의 터진 뺨, 춘자 할매의 울음, 그리고 길남이네 막내의 싸늘한 죽음… 모든 고통이 그들의 머릿속을 스쳤다.
한 청년이 괭이를 들고 나섰다. 다른 이들은 농기구를 집어 들었다. 그들의 손은 떨렸지만, 눈빛은 더 이상 공포에 잠겨 있지 않았다.
“이것이… 반역이다.” 베릭 대위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좋다. 개미 떼 같은 너희가 감히 제국을 거스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군. 오늘 이 황혼골을 피로 물들여주마!”
병사들이 무자비하게 공격해왔다. 카인은 가장 앞에서 도끼를 휘둘렀다. 그의 뒤로 마을 사람들이 주저하며 다가왔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길남이네 막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내 아들을 죽인 놈들에게 복수할 테다!”
그의 외침은 불씨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번졌다. 그들은 더 이상 겁먹은 양 떼가 아니었다. 굶주리고 지쳐 절망했지만, 이제는 분노로 무장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의 등 뒤로, 붉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피로 물들 하늘 아래, 황혼골의 밤은 길고 잔혹할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밤이기도 했다. 거대한 제국에 맞서는, 한 줄기 약한 빛이 마침내 깨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