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붉은 먼지 속 그림자

천지는 붉은 먼지로 물들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아득한 옛날, 이곳은 푸른 하늘 아래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영봉(靈峰)과 맑은 계곡으로 가득한 선경(仙境)이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빛바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뒤틀린 철골 구조물이 거인의 뼈대처럼 솟아 있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황량한 바람이 울부짖었다. 저 멀리, 한때 위용을 자랑했을 거대한 도성(都城)의 잔해가 붉은 노을 속에서 유령처럼 일렁였다.

진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타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돌멩이 소리조차 주변의 고요를 깨트릴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등에는 낡고 해진 배낭이 들러붙어 있었고,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이 덜렁거렸다. 단전(丹田) 속 영력(靈力)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나마 남아있는 미약한 기운마저도 혹독한 환경 탓에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젠장, 또 헛걸음인가.”

진은 낮게 읊조렸다. 폐허가 된 연구실의 입구를 겨우 찾아냈지만,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먼지 덮인 실험 도구들이 나뒹굴고, 선조들의 영력이 응축된 귀한 영약(靈藥)을 보관했을 법한 선반들은 모조리 부서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이 세계가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불리는 대재앙 이후, 영기(靈氣)는 비틀리고 오염되었다. 수많은 선인(仙人)들은 죽거나, 미쳐서 괴물이 되었고, 영물(靈物)들마저 형체를 알 수 없는 이형(異形)으로 변모했다. 평범한 인간들은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진처럼, 미약하게나마 영력을 다룰 줄 아는 자들뿐이었다. 그들은 황폐해진 세상에서 오염되지 않은 영물을 찾아 헤매거나, 선조들이 남긴 잔여 영력을 찾아 목숨을 이어갔다.

창 밖으로 붉은 먼지 폭풍이 불어왔다. 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단순히 먼지 폭풍이 아니었다. 이젠 너무나 익숙한, 무언가의 기척이었다.

그림자.

소리 없이, 형태 없이.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이 폐허에 도사리는 가장 은밀하고 치명적인 존재. 영력에 굶주린 그림자 추적자. 녀석들은 시각이나 청각이 아닌, 살아있는 자들의 영력을 감지해 추적하는 능력을 지녔다. 한 번 표적이 되면 집요하게 따라붙어 영력을 흡수해버리는 악몽 같은 존재였다.

진은 자신의 영력을 최대한 억눌렀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숨결마저 조절하며 벽 뒤에 바싹 몸을 숨겼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존재감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스으으…**

공기가 희미하게 진동하는 소리. 그것은 바람 소리도, 먼지가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림자 추적자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마치 어둠 자체가 움직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진은 검을 뽑아 들었다. 녹슨 날붙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왼손으로는 등 뒤의 배낭에서 작은 영석 조각을 꺼내 쥐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영석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것마저 쓰게 된다면, 다음은 정말로 끝이었다.

발소리가 멈췄다. 바로 코앞, 복도를 사이에 두고 그림자가 멈춰 서 있었다. 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영력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녀석이 감지하는 것은 영력만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생명의 기운, 그 원초적인 힘이었다.

“젠장….”

진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미약한 영력으로? 그림자 추적자는 실체가 없어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영력으로 이루어진 공격만이 녀석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진은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전 속에서 바닥을 긁어모으듯 마지막 남은 영력을 쥐어짰다. 손에 쥔 영석이 희미하게 빛나며 진의 손아귀 속으로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영석의 기운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력이었기에, 잠시나마 진의 단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이 조각 하나로는 그림자 추적자를 완전히 소멸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진은 검을 쥔 손에 영력을 집중시켰다. 날붙이에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될, 필살의 일격이었다.

**파앗!**

진은 벽 뒤에서 튀어나갔다. 검이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그림자 추적자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마치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듯한 움직임으로 진의 공격을 회피했다.

“크윽!”

진의 검은 허공을 가르고, 그림자 추적자는 진의 옆구리를 향해 그림자 촉수를 휘둘렀다. 마치 검은 안개 같은 촉수였다. 스치기만 해도 영력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공격.

진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촉수가 스친 자리에 찌릿한 고통과 함께 영력이 빨려 나가는 감각이 엄습했다.

“젠장, 너무 빨라…!”

그림자 추적자는 멈추지 않았다. 놈은 진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마치 오랜 사냥꾼처럼, 진의 약점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은 건물의 구조를 떠올렸다. 폐허가 된 연구실은 수많은 통로와 잔해로 얽혀 있었다. 도망치는 것보다는 이 복잡한 구조를 이용해 녀석을 가두거나, 아니면 실체를 가진 무언가에 부딪히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림자 추적자는 실체가 없는 존재.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었다.

**아니, 전부 다는 아니야.**

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완벽한 그림자는 이 세상에 없다. 모든 그림자에는 원형이 있다. 영력이 오염된 존재라도, 본질적인 무언가는 남아있을 터였다.

그림자 추적자가 다시 촉수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훨씬 더 넓은 범위를 덮치며 진을 압박했다. 진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거라도 먹어라!”

진은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영석 조각을 그림자 추적자를 향해 던졌다. 영석은 작았지만,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력이 응축된 물질이었다. 영력에 굶주린 그림자 추적자는 본능적으로 영석에 이끌렸다. 그림자 형태가 잠시 흐트러지며 영석을 향해 집중하는 찰나의 순간.

**바로 지금!**

진은 검을 비틀어 잡고, 마지막 남은 모든 영력을 검 끝에 쏟아부었다. 검신에서 푸른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모든 힘을 실어 바닥을 내리쳤다.

**콰아앙!**

강철 바닥이 진의 영력에 의해 찢겨 나갔다.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진이 익힌 심법(心法)은 영력을 폭발시켜 주변 환경에 강력한 충격을 가하고, 특정 주파수의 진동을 일으켜 기운을 뒤흔드는 기술이었다.

그림자 추적자는 영석에 집중하느라 진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강력한 진동과 함께 주변 공간의 영기가 뒤틀리자, 실체가 없던 그림자 추적자의 형체가 순간적으로 왜곡되며 비틀렸다. 흡사 거대한 먹구름이 번개에 찢겨 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아아악!”

형체 없는 비명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그림자 추적자는 흩어지는 잔해처럼 희미해지며 뒤로 물러섰다. 영석 조각은 이미 녀석에게 흡수되어 버렸지만, 진의 공격으로 인해 녀석 또한 큰 타격을 입은 듯했다.

하지만 진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검을 지탱하던 손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단전은 완전히 텅 비었고, 온몸의 세포가 영력 고갈로 비명을 질렀다. 겨우 지탱하던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진은 본능적으로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 추적자는 잠시 흩어졌던 형체를 다시 수습하고 있었다. 완전히 소멸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진의 공격이 녀석에게 치명적이었는지,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주춤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녀석은 흐릿한 눈동자처럼 진을 응시하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 듯 사라졌다.

“하아, 하아….”

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지막 영석마저 써버렸고, 영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털썩 주저앉아 폐허가 된 연구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희망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진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연구실 가장 안쪽, 무너진 선반 더미 아래에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다른 모든 영약은 약효를 잃거나 부서져 있었는데, 저 빛은?

진은 몸을 이끌고 겨우 다가갔다. 찢겨진 선반 틈새로 손을 뻗어 잔해를 걷어내자, 작은 유리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 속에는 맑은 영액(靈液)이 담겨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액. 병 옆에는 낡은 표찰이 붙어 있었다.

**’정신력 보존의 영액’**

진의 눈이 커졌다. 정신력 보존의 영액. 이것은 영력을 직접 회복시켜주는 약이 아니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막아주는, 선조들의 비약(秘藥)이었다. 한 방울만으로도 며칠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생존의 희망.

진은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움켜쥐었다. 기적이었다. 이 절망적인 폐허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라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진의 눈은 다시 차갑게 식었다. 유리병 아래, 먼지 쌓인 바닥에 그려진 희미한 그림 때문이었다.

누군가 남긴 듯한 벽화. 붉은 피 같은 물감으로 그려진 것은, 거대한 괴물들의 행렬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들의 선두에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등에는 거대한 날개가 돋아 있고 얼굴에는 고통과 광기가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존재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모든 절망과 파괴를 이끄는 군주처럼.

그 그림은, 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어둠의 군주’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리고 벽화의 구석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의 끝은 시작일 뿐….’**

진은 영액을 든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영액은 생존의 희망을 주었지만, 이 벽화는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절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둠의 군주. 그저 전설 속 존재라고 여겼던 그가, 다시금 이 황폐한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징조란 말인가.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채, 진은 병을 든 채 붉은 먼지 가득한 폐허 속에서 다음 발걸음을 고민했다. 과연 이 희망은 진을 어디로 이끌 것인가. 그리고 그림 속 어둠의 군주는, 정말로 다시 깨어날 것인가.

세상은,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