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얇았다. 희뿌연 대기 너머로 간신히 새벽의 기운이 비쳐들 뿐, 태양은 자신이 내뿜던 격렬한 불꽃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는 낡은 방진 마스크 위로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먼지, 언제나 먼지였다. 대재앙 이후 50년. 지구가 토해낸 재는 켜켜이 쌓여 모든 것을 덮었고, 그 위로 자라난 질긴 잡초와 뒤틀린 나무들만이 이 폐허가 된 세계의 새로운 주인이었다.
“또 시작이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갈라진 내 목소리는 마스크 안에서 퍽퍽하게 울렸다. 오늘은 구(舊)서울의 외곽, 과거엔 ‘강동 산업 단지’라 불리던 곳을 뒤질 차례였다. 재앙 직전, 인류는 무언가를 대비하듯 온갖 물품을 쟁여두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지금 우리 같은 생존자들의 유일한 자원원이었다. 물론, 위험을 감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무너진 고가도로 잔해를 피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차량으로 빼곡했을 아스팔트 도로는 거대한 균열과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가끔 녹슨 자동차 프레임이 흉물스럽게 박혀 있을 뿐, 어떤 생명체도 지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선에서는. 이곳은 겉으로 보기에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손에 쥔 낡은 금속 탐지기가 작게 삐익- 삐익- 소리를 냈다. 수십 년 전의 전자기기들은 대부분 먹통이 되었지만, 이런 구닥다리 탐지기는 의외로 생명력이 길었다. 건전지 대신 태양열 충전식으로 개조한 덕분이었다. 나는 소리에 이끌려 녹슨 공장 건물의 잔해 쪽으로 향했다.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낙서와 과거의 포스터 조각들이 바람에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 남겨진 마지막 흔적들이겠지.
탐지기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특정 지점에서 날카롭게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을 냈다. 이 소리는 금속이 아닌, 밀폐된 공간에서 나오는 미약한 공기 흐름이나 유기 물질 반응을 감지했을 때 나는 소리였다. 희귀한 물건, 혹은… 변이체. 둘 중 하나였다. 나는 휴대하고 있던 낡은 쇠 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끝부분은 뾰족하게 갈아 날을 세웠고, 손잡이 부분은 천 조각으로 두껍게 감아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이 녀석은 내 생명줄이었다.
낡은 철문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힘껏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쪽 경첩이 떨어져 나갔다. 안쪽은 지독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흙먼지로 가득했다. 탐지기는 여전히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내부 구조는 옛날 물류 창고 같았다. 선반들은 대부분 썩어 무너졌고, 그 위로 천장에서 떨어진 흙먼지가 수북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보이는 것은 녹슨 철제 골격과 폐기물뿐이었다. 하지만 탐지기는 여전히 맹렬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있었다. 나는 바닥을 살폈다. 흙먼지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자, 두꺼운 플라스틱 재질의 수납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상 보급품’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재앙 이전의 비상 보급품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특히 완벽하게 밀봉된 상태라면, 내용물은 시간이 멈춘 듯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정착지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식량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의약품.
수납함 뚜껑을 열기 위해 애썼다. 오랜 시간의 압력 때문인지 뚜껑은 굳게 닫혀 있었다. 쇠 파이프 끝으로 틈새를 공략하려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번개 같은 움직임이었다.
창고 안쪽, 엉망진창으로 쌓인 폐기물 더미 사이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개였다. 하지만 보통 개가 아니었다. 늑대보다도 훨씬 크고, 털은 거친 흑회색이었으며, 네 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고 날렵했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그 녀석의 눈이었다. 핏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굶주림과 광기로 가득했다. 이 폐허의 진정한 지배자, ‘골견(骨犬)’이었다. 녀석의 송곳니는 뼈를 으스러뜨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젠장…!”
외마디 욕설이 터져 나왔다. 탐지기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이 녀석은 금속 탐지기가 감지하던 ‘유기 물질 반응’의 주인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골견은 짐승 같은 민첩함으로 파이프를 피하며 내 복부를 노리고 뛰어들었다. 녀석의 입에서 역겨운 비린내가 풍겼다.
간발의 차로 몸을 비틀었다. 골견의 날카로운 발톱이 내 허벅지를 스쳤다. 마스크 너머로 아픔과 함께 섬뜩한 냉기가 파고들었다. 두꺼운 작업복이었지만, 찢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은 한 번의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자세를 낮췄다. 이번에는 목을 노릴 게 분명했다.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 파이프를 휘둘렀다. 이번엔 바닥을 노렸다. 녀석이 뛰어오르는 순간, 파이프 끝으로 바닥의 흙먼지를 강하게 쓸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재로 뒤덮였다.
“크르르르…!”
골견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잠시나마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나는 망설임 없이 수납함 옆에 널브러져 있던 녹슨 철제 패널을 발로 걷어찼다. 끼이잉- 거친 소리와 함께 패널이 골견이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녀석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휘청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녀석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할 터였다. 나는 지체 없이 수납함을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뚜껑이 열리면서 내용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육포 통조림, 물병, 그리고… 낡은 응급 처치 키트.
그 키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진짜 노다지였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항생제, 소독약, 그리고 진통제. 우리 정착지에는 항상 이런 약품들이 부족했다. 특히 재앙 이후 급격히 변이된 세균들은 평범한 상처도 치명적으로 만들곤 했다.
나는 가장 먼저 항생제 병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골견을 노려봤다. 녀석은 여전히 흙먼지 속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놈에게 시간을 줘선 안 된다.
“이리 와, 이 개자식아!”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 골견은 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나는 수납함에서 튀어나온 쇠붙이 잔해들을 향해 녀석을 유인했다. 녀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는 순간, 나는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녀석의 눈을 향해 힘껏 던졌다.
깡! 둔탁한 소리와 함께 캔이 녀석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잠깐의 경직. 그 순간, 나는 쇠 파이프를 양손으로 잡고 모든 체중을 실어 녀석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골견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번 더. 나는 쓰러진 녀석의 머리를 향해 파이프를 내리쳤다. 녀석의 몸이 경련하듯 떨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핏빛 눈동자에서 광기가 사라지고 텅 빈 허무함만이 남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스크 안이 땀으로 축축했다. 허벅지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큰 상처는 아닌 듯했다. 재앙 이전의 육포 통조림 두 개, 물병 세 개, 그리고 항생제 한 병. 그리고 다행히도, 녀석의 송곳니에 찢기지 않은 응급처치 키트. 오늘은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 큰 위험을 마주했다.
정신없이 수납함 안의 내용물들을 챙겨 낡은 배낭에 쑤셔 넣었다. 골견의 시체를 확인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폐허에서 죽은 변이체들은 또 다른 변이체를 불러 모으는 법이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 낡은 철문을 다시 닫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왔다. 잿빛 대기 속, 해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은 어슴푸레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향해야 할 정착지는 저 붉은빛 너머에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낡은 길을 따라 달렸다. 폐허 도시의 윤곽이 점점 멀어지고, 비포장도로와 거친 들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연기 기둥 하나. 우리 정착지의 연기였다.
“하아… 하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그 순간, 연기 기둥 옆으로 또 다른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연기 기둥은 우리 정착지의 방향이 아니었다.
아니, 저건… 너무 검붉었다.
마치, 무언가가 불타고 있는 것처럼.
내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다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희미한 붉은빛이 드리워진 황폐한 대지 위를,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
무슨 일이지? 설마, 그들이… 여기까지 온 건가?
불안한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등 뒤로 폐허 도시의 마지막 숨결이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나의 작은 정착지가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이미 재앙의 또 다른 시작을 향해 내딛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