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고층 건물 사이로 끈적한 어둠이 깔렸다. 진은 허물어진 콘크리트 잔해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녹슨 철근이 비명을 지르듯 바람에 울었고, 먼지 섞인 공기는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이곳은 한때 번화했던 수도의 심장부였지만, 지금은 제국의 그림자 아래 버려진 폐허, ‘잊힌 구역’일 뿐이었다.
“쉬잇.”
앞서가던 한솔의 손이 올라왔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어둠 속을 꿰뚫었다. 일행은 일제히 몸을 숙여 붕괴된 버스 잔해 뒤로 숨었다. 진은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뛰는 것을 느꼈다. 쿵, 쿵. 마치 망치질 소리처럼 고막을 때렸다.
“저기다. 강철 심장 보급창.”
한솔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거대한 철문이 녹슨 채 닫혀 있는 흉물스러운 건물이었다. 한때 제국의 물자를 실어 나르던 요충지였지만, 수십 년간 버려져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국의 감찰단도 이곳을 깊이 수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 안에 잠들어 있을 오래된 통신 교란기 설계도였다. 혁명군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제국의 선전 방송을 무력화할 유일한 희망.
“미나, 드론 시야 확보.” 한솔이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정찰 드론 ‘눈’을 꺼냈다. 그녀의 능숙한 손가락이 터치패드를 스쳤고, 작은 날개가 윙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솟아올랐다. ‘눈’은 마치 박쥐처럼 소리 없이 폐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며 주변을 탐색했다.
“북쪽 구역 이상 없음. 서쪽도… 그런데.”
미나의 목소리에 미묘한 불안감이 섞였다. 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더욱 낮췄다.
“남동쪽 구역, 움직임 포착. 패턴 불규칙. 우리 쪽 정찰과는 다른데요. 온도가… 좀 높아요.”
진의 옆에 선 대철이 묵직한 개조형 산탄총을 꽉 쥐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감찰단 놈들인가? 아니면 제국 수호대?” 대철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이젠 잊힌 구역까지 기어들어 오는 건가.”
“아니다. 미나,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봐.” 한솔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예리했다.
‘눈’은 미나의 조종에 따라 다시 남동쪽으로 향했다. 스크린에 희미하게 잡히는 열감지 영상은 점점 뚜렷해졌다.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폐건물 사이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통의 제국 보병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였다.
“헌터 유닛…!” 미나의 입에서 탄식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헌터 유닛. 제국의 최정예 기계병으로, 폐허 지대에서 생존자들을 사냥하고 혁명군을 색출하는 데 특화된 살상 병기였다.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기계로 된 머리에는 붉은 탐조등이 달린 섬뜩한 존재들. 그들은 보통 소규모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스크린에 찍힌 두 개의 유닛은 정찰이나 수색이 아닌, 마치…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젠장. 제국 놈들이 이곳을 다시 활성화시킨 건가?” 진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오히려 불안한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니, 활성화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해. 이건… 함정이야.” 한솔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미나, 헌터 유닛이 움직이는 경로 파악해. 대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들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잊힌 구역은 더 이상 잊힌 구역이 아니었다. 제국은 이곳에 무언가를 숨겨두거나, 혹은 혁명군을 낚기 위한 미끼를 던져 놓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통신 교란기 설계도는 혁명군의 사기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헌터 유닛의 이동 패턴 분석 완료. 30분 간격으로 외곽을 순찰합니다.” 미나가 다급하게 보고했다. “안쪽으로 진입하려면 저들의 순찰이 끝나는 틈을 타야 합니다. 하지만… 보급창 입구에 적외선 센서가 설치되어 있어요. 기존에는 없던 겁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완벽하게 제국의 덫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방법은 딱 하나다.” 한솔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눈빛이 진을 향했다. “진, 네게 가장 익숙한 방식이 필요해.”
진은 한솔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은 팀에서 가장 몸놀림이 빠르고 은밀했다. 센서를 우회하거나, 혹은 무력화하는 방법은 자신이 찾아야 했다. 하지만 헌터 유닛의 감시 아래에서, 그것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센서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시간은 얼마나 주실 수 있습니까?”
“헌터 유닛이 다음 순찰을 시작하기 전까지. 10분.” 한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폐허의 잔해 사이를 마치 유령처럼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헌터 유닛의 움직임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기계 병사들이 붉은 탐조등을 휘두르며 건물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그들의 기계음이 바람을 타고 진의 귀에 닿았다. 진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강철 심장 보급창의 철문 앞에 도착했을 때, 진은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붉은빛을 발견했다. 미나가 말했던 적외선 센서였다. 단순한 열감지기가 아닌, 레이저 센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건드리는 순간 경보가 울릴 터였다.
헌터 유닛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쿵, 쿵. 마치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 같았다. 진은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순찰하던 헌터 유닛 하나가 바로 진이 숨은 벽 너머를 지나쳤다. 붉은 탐조등이 진의 그림자를 스쳐 지나갔다.
위험이 지나가자 진은 재빨리 움직였다. 센서를 무력화할 도구가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통과해야 했다. 진은 짧은 순간 레이저의 배열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폐허 속에서 갈고리 달린 낡은 케이블 조각을 발견했다. 진은 케이블을 능숙하게 휘둘러 센서의 틈새에 걸고, 마치 곡예사처럼 몸을 회전시켜 레이저 망을 통과했다.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성공입니다. 진입했습니다.” 진이 무전으로 짧게 보고했다.
“좋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오래된 제어실이 있다. 그곳에 설계도가 있을 확률이 높다.” 한솔의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진은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보급창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내부는 예상했던 대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녹슨 선반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진은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어실… 제어실…”
벽면에 희미하게 남은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향했다. 복잡한 선반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자, 작은 강철문이 나타났다. 진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작은 제어실 안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낡은 제어판과 전원이 나간 모니터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진은 손전등으로 방 안을 훑었다. 바로 그때,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벽면에 붙어있는 낡은 캐비닛. 그 위에 먼지 쌓인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제국의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진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낡은 종이뭉치가 들어 있었다. 통신 교란기 설계도였다.
“찾았습니다! 설계도를 찾았습니다!” 진이 흥분한 목소리로 무전했다.
“좋아, 진. 바로 회수해서 나와. 헌터 유닛이 다시 순찰을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간다.” 한솔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은 설계도를 품에 안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제어실 입구에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헌터 유닛. 붉은 탐조등이 진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분명히 순찰 시간은 아직 남았을 터였다.
‘함정이었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헌터 유닛의 붉은 탐조등이 진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 기계적인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진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제어실 안쪽 구석에 놓인 낡은 테이블 위, 먼지 쌓인 서류 더미 아래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버튼에는 알 수 없는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게, ‘비상 잠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진은 직감했다. 이 제어실은 단순한 보관소가 아니었다. 제국이 혁명군을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완벽한 함정이었다. 그리고 이 버튼은…
헌터 유닛의 팔에서 살상 무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에게 남은 시간은 단 몇 초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대로 헌터 유닛과 싸우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저 알 수 없는 ‘비상 잠금’ 버튼을 눌러 미지의 결과를 맞이할 것인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제어실에서, 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손은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 버튼을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