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마루 한쪽을 환하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한유진은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잔잔한 재즈 선율이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고, 커피의 그윽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깨끗한 노트를 펼쳐두고, 멍하니 햇살 속을 유영하는 먼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 평화는 정확히 오전 8시 17분,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의 진동으로 깨졌다. 화면에 뜬 이름은 ‘김도윤 경감’. 유진은 한숨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유진 씨! 제발, 지금 당장이라도 좀… 아니,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해서.”
수화기 너머 김도윤 경감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조급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마치 불이라도 난 듯한 다급함과, 한유진이라는 존재에 대한 미묘한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김 경감님, 무슨 일이세요? 목소리에 가시가 돋았네요.”
“가시라니요, 한유진 씨! 아, 정말 큰일 났습니다. 또 밀실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니, 이 얘기는 직접 오셔서 듣는 게 빠를 겁니다. 장소는 동화 아파트 101동 704호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김도윤 경감은 마지막 말을 거의 울부짖듯이 뱉으며 전화를 끊었다.
유진은 머그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화로웠던 아침의 흔적들이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흐트러진 머리를 묶고, 간결한 코트를 걸쳤다. 밀실 살인이라. 오랜만에 제법 흥미로운 퍼즐 조각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동화 아파트 단지는 이름처럼 동화 같지는 않았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회색빛 벽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704호 앞은 이미 노란 폴리스 라인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굳은 표정의 형사들이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진이 도착하자마자 김도윤 경감이 달려왔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한유진 씨!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 그래도 연락드릴 참이었습니다.”
“급하다는 전화치고는 꽤 여유가 있으시네요.” 유진은 경감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똑바로 고쳐주며 말했다. “사건 현장에 대한 설명부터 들어볼까요?”
“아, 네! 들어오시죠.”
유진은 경감의 안내를 받아 조심스럽게 현장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낯선 금속성 냄새와 희미한 피 냄새가 뒤섞여 공중에 떠다녔다. 한눈에 보기에도 깔끔하게 정돈된 아파트였다. 피해자는 50대 초반의 남성, 이름은 박민철. 유명한 건축가였다고 했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고, 그의 옆에는 묵직해 보이는 은색 트로피 하나가 굴러다녔다. 머리에는 출혈 흔적이 선명했다.
“사인은 두부 손상으로 추정됩니다. 트로피로 가격당한 것 같습니다.” 김도윤 경감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문제는… 밀실이라는 겁니다.”
유진은 아무 말 없이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모든 창문은 안에서 걸쇠로 잠겨 있었고, 현관문도 안에서 이중 잠금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베란다 쪽 창문도 방충망과 유리창 모두 안쪽에서 잠금 상태였습니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요?” 유진은 바닥에 흩어진 먼지 한 조각에도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없습니다. 지문 감식반이 샅샅이 뒤졌지만,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외부 침입도, 내부 탈출도 불가능한 완벽한 밀실입니다.”
“시신 발견 당시 상황은요?”
“피해자의 비서가 연락이 닿지 않자 걱정되어 찾아왔다가, 관리사무소 직원과 함께 문을 따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비로소 시신이 발견된 겁니다. 잠금장치는 모두 안에서 그대로 걸려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유진은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피해자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창백하고 굳은 표정. 그녀는 시선을 들어 천장의 조명을 바라봤다. 하얀색 전등갓 아래에 아주 작은, 거의 보이지 않는 얼룩이 있었다.
“김 경감님, 이 집에는 환풍기가 없나요?”
유진의 엉뚱한 질문에 김 경감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환풍기라니요? 아, 부엌 쪽에는 당연히 있지만… 거실에는 따로 없습니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현관문도 안에서 잠겨 있었다… 시신은 언제 발견되었죠?”
“오전 9시 30분경입니다.”
“사망 시각은요?”
“대략 어젯밤 10시에서 자정 사이로 추정됩니다.”
유진은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거실 한쪽 벽에는 박민철 건축가의 수상 경력을 알리는 액자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해자 옆에 굴러다니는 트로피와 똑같은 모양의 트로피가 놓인 사진 액자였다.
“피해자는 어제 저녁에 누군가를 만날 예정은 없었나요?”
“비서의 진술에 따르면, 어제 저녁에는 혼자 저녁 식사를 하고 휴식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특별한 약속은 없었다고… 다만, 한 시간 정도 친구와 통화를 했다고 합니다. 오후 8시경에요.”
“통화 내용은요?”
“일상적인 대화였다고 합니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느리지만 멈춤 없이 방 안의 모든 디테일을 훑고 있었다. 벽지의 미묘한 패턴, 소파의 주름,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의 밀도까지도. 그녀의 시선이 문득 바닥 모서리의 아주 작은 홈에 머물렀다. 눈에 띄지 않는 아주 희미한 스크래치였다.
“이 스크래치… 언제 생긴 거죠?” 유진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김 경감은 고개를 숙여 스크래치를 확인했다.
“글쎄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라… 범행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그럴까요?” 유진의 목소리에는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 밀실은, 사실은 밀실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펼쳤다. 여전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깨끗한 백지였다. 유진은 연필을 들어 종이 위를 스치듯 움직였다. 깨끗한 종이 위에, 마치 조용히 피어나는 꽃잎처럼 몇 개의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밀실이라는 건 결국,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는 착시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무엇이 있었는가겠죠.”
그녀의 눈빛은 마치 심연을 꿰뚫어 보는 듯 차분하면서도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의 커피 향처럼, 그리고 햇살 속 먼지처럼, 찰나의 순간에도 모든 것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김도윤 경감은 유진의 옆에서 그녀의 종이 위에 그려지는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 천재적인 탐정이 어떤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고 있는지, 이 고요한 분석 속에서 어떤 진실이 꽃을 피울지. 모든 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