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독립적인 단편 소설

김민준은 자신이 선택한 아파트에 자부심이 있었다. 강남의 번잡함에서 살짝 비껴난 신축 건물, ‘스카이뷰 팰리스’. 서른두 평의 공간은 흰색과 회색으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었고, 창밖으로는 시원하게 뚫린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축가로서 그는 이 공간이 현대인의 이상적인 주거 공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첫 한 달 동안은 그랬다.

“탁!”

처음에는 소리가 아니었다. 단지, 민준이 침대에 몸을 던지는 순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연필 한 자루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주워 올렸다. 피곤해서 그랬겠거니.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밤새 충전해두었던 휴대폰이 침대 협탁이 아닌, 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충전기에서 뽑힌 채로.

“음, 잠결에 그랬나.”

민준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은 예측 가능성과 설계, 그리고 논리에 기반을 둔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설명 가능하다고 믿는 부류였다. 그러나 그 믿음은 그의 아파트에서 서서히 균열 가기 시작했다.

주말, 오랜만에 동창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돌아온 새벽.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거실의 스탠드 등이 스스로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민준은 눈을 비볐다. 취했나. 스위치를 다시 눌러 켜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환하게 빛났다.

다음 주에는 더 이상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다. 출근 준비를 위해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지갑이 사라졌다가 퇴근 후 침대 아래에서 발견됐다.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반찬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소리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낡은 라디오의 잡음 같기도 한 웅얼거림이 밤마다 들려왔다.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 잊힌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이.

민준은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 날 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가만히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벽걸이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때였다.

“슥, 스스슥……”

소리는 그의 뒤편, 주방 쪽에서 들려왔다. 마치 손톱으로 나무를 긁는 듯한, 작고 날카로운 소리. 그는 벌떡 일어섰다.

“누구세요?”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도 멀쩡했다. 바닥에는 아무 자국도 없었다. 그런데, 민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식탁 한가운데에 놓인, 웬 흙먼지 묻은 조약돌 하나였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아파트에는 이런 물건이 없었다.

“이게 뭐야…”

그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 들었다. 차가웠고, 흙냄새가 났다. 마치 땅속에서 방금 파낸 것 같은. 그 순간, 그의 손 안의 조약돌이 뜨거워졌다. 너무 뜨거워서 비명을 지르며 떨어뜨렸다. 조약돌은 바닥에 닿자마자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본 것은, 조약돌이 깨진 조각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마치 흙으로 빚어진 작은 인형의 파편이었다. 아주 오래된, 손때 묻은 형상이었다.

민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는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모든 현상에 대한 답을 찾기로 결심했다. 밤낮으로 인터넷을 뒤졌다. ‘스카이뷰 팰리스’ 아파트의 건축 기록, 지번의 과거 기록, 그 주변 지역의 옛 사진들까지. 처음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농경지였다는 기록들 뿐이었다. 그러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오래된 게시물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제목은 ‘사라진 고지마을 이야기’.

게시물은 잊혀진 마을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었다. 약 40년 전, 이 지역이 대규모 도시 개발 지구로 편입되면서, 지도에도 없던 작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는 효율적인 도시 계획을 위해 일부 지역의 독특한 문화나 공동체를 배제하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고, 이 마을도 그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토속 신앙과 독특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큰 저항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있었다. 이주 과정은 공식 기록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었으며, 그들의 존재와 역사는 철저히 지워졌다는 암시가 있었다.

특히 민준의 눈길을 끈 것은 한 사진이었다. 흑백의 희미한 사진 속에는 그의 아파트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허름한 가옥들 사이로 작은 당집 같은 것이 보였다. 그 당집 앞에는 흙으로 빚은 듯한 작은 인형들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어젯밤 깨졌던 조약돌 속의 인형 파편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사진 속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마치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예감한 듯, 슬픔과 체념,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밤, 민준은 잠들 수 없었다. 잠시 눈을 붙이려던 순간,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거실에 서 있었지만, 모든 것이 달랐다. 벽은 낡은 나무판자로 바뀌었고, 바닥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에서는 빗물이 새는 듯한 물방울 소리가 났다. 창밖으로는 고층 빌딩 대신, 굽이굽이 이어진 좁은 골목길과 허름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모닥불과 흙벽에 걸린 낡은 등불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리고 소리. 수많은 사람들의 웅얼거리는 목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들리는 굉음. “우르르 쾅쾅!” 거대한 기계음이었다. 포클레인과 불도저 소리. 그 소리에 맞춰, 집들이 무너져 내리는 환영이 보였다. 낡은 기왓장이 부서지고, 나무 기둥이 꺾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안 돼! 이 땅은… 우리의 터전이야!”

한 노파의 비명 소리가 그의 귀를 찢었다. 노파는 먼지 속에 주저앉아, 작은 흙인형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절망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민준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이한 현상들은, 사라진 마을의 메아리였다. 강제로 뜯겨 나간 삶의 흔적들이, 억눌린 채 이 땅에 남아 울부짖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지워졌지만, 이 땅은 그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노파는 자신의 손에 들린 흙인형 하나를 땅속 깊이 묻으려 애썼다. 흙인형이 땅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민준의 아파트 거실 바닥이 갈라지며 그 틈으로 흙먼지가 솟구쳐 올랐다.

“돌려줘… 우리를 잊지 마…”

수많은 목소리가 민준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환영은 서서히 사라졌다. 다시 익숙한 흰색 벽과 깨끗한 마루바닥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였다.

하지만 민준은 더 이상 예전의 민준이 아니었다. 그의 아파트, 그의 삶은 더 이상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밤마다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 가끔씩 스스로 움직이는 물건들, 그리고 한 번씩 느껴지는 차가운 손길. 그는 이제 그것들이 더 이상 자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이야기였다. 잊힌 과거가 현재를 두드리는, 간절한 이야기.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침묵하지 않는 외침이었다.

민준은 아파트의 거실 한쪽 구석에 작은 탁자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깨어진 조약돌의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모아 올려두었다.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한 공간에, 흙냄새 배인 파편들이 놓여 있는 모습은 어딘가 기묘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일종의 ‘기념’이라 생각했다. 사라진 이들의 작은 흔적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나마 들어주는 일. 어쩌면 그게, 이 아파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날 이후, 민준의 아파트는 조용해졌다.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았다. 물건들이 제자리를 벗어나거나, 불이 깜빡일 때면, 그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가끔, 희미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그는 픽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여기가 너희들의 집이었지.”

그는 더 이상 이사를 생각하지 않았다. 스카이뷰 팰리스, 그의 아파트는 이제 그에게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역사가 겹쳐진, 살아있는 기억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기억의 수호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도심의 한복판, 고층 아파트의 한 유닛에서, 잊힌 과거는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끈질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