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시간, 녹슨 철골들이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도시의 잔해 속에서 강민은 숨을 죽였다. 지독한 먼지바람이 살을 에는 칼날처럼 얼굴을 스쳤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붉게 물든 노을이 저 멀리 부서진 마천루의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아래, 수십 개의 판자집과 급조된 바리케이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희미한 불빛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전선 사이로 깜빡였다.
‘찾았다. 드디어.’
굳게 다문 입술 새로 피 맛이 감돌았다. 일 년. 빌어먹을 일 년이었다. 최준, 네놈이 나를 버리고 떠난 지. 그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끓어오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차가운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믿었던 동료? 아니, 형제였다. 아니, 그랬던 줄 알았다. 종말이 세상을 덮치기 전부터 모든 것을 공유했던 사이다. 그런 네가 내 심장을 찢어 발기고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을 때, 난 그 지옥 같은 폐허 한복판에서, 네가 등 뒤에 남긴 칼날의 통증을 온몸으로 느끼며 죽어갔지.
강민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망원경으로 거점을 다시 살폈다. 녹슨 철근 울타리,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낡은 철판과 타이어로 쌓아 올린 벽. 그 안에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망원경 초점을 맞추자 경계를 서는 두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조악하게 개조된 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고, 얼굴에는 굶주림의 흔적 대신 제법 살집이 붙어 있었다.
‘잘 먹고 잘 사는구나, 이 개자식.’
강민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날카로운 흙먼지가 파고들었지만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배신 이후, 오직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이 그를 살아남게 했다. 썩어가는 시체를 뒤져 먹고, 돌연변이 괴물과 사투를 벌이며, 맹렬한 추위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겨왔다. 그 모든 순간, 최준의 배신은 그를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었다.
정면 돌파는 무모했다. 강민은 주변 지형을 빠르게 스캔했다. 부서진 고가도로 잔해가 거점 남쪽 벽과 맞닿아 있었다. 그 사이, 어둠에 잠긴 좁은 틈이 보였다. 오래된 콘크리트 덩어리가 무너지면서 생긴 공간 같았다. 완벽한 진입로였다.
그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발아래 부서진 파편들이 바스락거렸지만, 그는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괴물의 울음소리에 맞춰 걸음을 조절했다. 낡은 부츠는 거의 소리 없이 땅을 밟았다. 망토처럼 걸친 헤진 천 조각들이 그의 몸을 어둠 속에 녹여냈다.
그때였다. 경계하던 한 명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강민이 숨어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민은 즉시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놈의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강민을 꿰뚫는 듯했다. 놈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바닥에 침을 뱉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마터면…!’
강민은 거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멀었다. 이 정도에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어둠 속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쪽은 바깥과는 다른 종류의 혼돈이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집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모닥불의 연기. 싼 값의 술 냄새, 고기 굽는 냄새, 그리고 씻지 않은 사람들의 체취가 뒤섞여 역한 기운을 풍겼다. 시끄러운 이야기 소리, 고성, 웃음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싸움 소리.
강민은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그들의 시야를 피하며 움직였다. 그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 절대 잊을 수 없는, 오만하고 경박한 웃음소리. 심장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떨어졌다. 최준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천막. 그 안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강민은 천막의 찢어진 틈새로 안을 엿보았다.
그곳에 최준이 있었다. 낡은 탁자에 앉아 거친 남자들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반쯤 먹다 남은 음식 접시가 그 앞에 놓여 있었고, 허리춤에는 조악하지만 제법 위협적으로 보이는 권총이 박혀 있었다. 그는 편안해 보였다.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함 대신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그 순간, 강민의 내면에서 차가운 광기가 솟구쳤다. 손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앙상한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지난 일 년간의 굶주림, 고통, 그리고 뼛속까지 시린 고독이 응축되어, 오직 하나의 욕망으로 폭발했다. 복수.
‘살아남았다, 최준. 네가 죽이려 했던 내가, 이렇게 살아남아서 네 코앞까지 왔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났다.
‘이제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난 너에게 모든 것을 빼앗을 거야. 하나도 남김없이.’
강민은 품속에서 낡았지만 날카롭게 갈린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에 희미한 불빛이 반사되어 번뜩였다.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곧, 피로 얼룩진 지옥이 시작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