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달이 산산조각 난 유리창 너머로 간신히 빛을 뿌렸다. 도시의 심장은 죽은 지 오래였지만, 그 가장자리에서는 기괴한 생명이 들끓었다. 매캐한 곰팡이 냄새와 피 썩은 비린내가 공기 중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신음과 긁는 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밤의 자장가였다.
강민은 무너진 상점 건물의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전진했다. 그의 손에 들린 녹슨 쇠지렛대가 달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옆에서 거친 숨을 내쉬던 혁준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젠장, 이 동네는 올 때마다 더 지옥 같군.”
“지옥이 어디 따로 있나. 여기지.” 강민은 그렇게 대꾸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했다. 먹을 것. 그리고 어쩌면, 쓸 만한 무기나 부품. 황금 제국은 벽 안에서 기름진 만찬을 즐기겠지만, 벽 바깥의 평민들은 매일 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세 명이 더 뒤를 따랐다. 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민아는 폐지를 뭉쳐 만든 임시 방패를, 덩치 큰 상구는 한 손에 망치를 다른 한 손에는 휘발유통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팀의 유일한 의무병인 수진은 작은 배낭에 응급 약품 몇 개를 챙긴 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저기, 저 건물 안쪽 같아요.” 민아가 낡은 아파트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창문이 모두 깨져나가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곳이었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저런 곳일수록 놈들이 우글거릴 가능성이 높아.”
그들이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습하고 음산한 기운이 확 끼쳐왔다. 복도에는 찢겨진 옷가지와 알 수 없는 얼룩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바닥에 고인 썩은 물을 밟을 때마다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젠장, 저거 봐.” 상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도 끝에서, 그림자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앙상한 팔다리, 부패한 살덩이, 그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 여섯, 아니 일곱 마리. 평소보다 많은 수였다.
“혁준, 수진, 후방.” 강민이 짧게 지시했다. “민아, 상구, 나와 함께.”
혁준은 녹슨 산탄총을 들고 재빨리 뒤를 막아섰고, 수진은 그의 옆에서 언제든 칼을 뽑을 준비를 했다.
강민은 쇠지렛대를 고쳐 쥐었다. “흩어지지 마!”
놈들이 썩은 목구멍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달려든 놈의 머리를 강민이 쇠지렛대로 정확히 후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끈적한 체액이 벽에 튀었다.
상구는 휘발유통을 던지고 망치를 휘둘러 또 다른 놈의 가슴팍을 부쉈다. 민아는 작은 몸으로 재빨리 놈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며 방패로 밀쳤다.
“혁준! 뒤!” 수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뒤에서 기어 나온 두 마리의 놈들이 혁준을 덮치려 했다. 혁준은 간신히 한 발을 쐈다. 콰앙! 놈의 어깨가 날아갔지만, 다른 한 놈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수진이 재빨리 칼을 뽑아 놈의 목을 그었다. 시커먼 피가 뿜어져 나왔다.
“탄약 아껴야 해!” 강민이 소리쳤다. “빨리 정리하고 물건 찾아!”
필사적인 사투 끝에, 놈들은 모두 쓰러졌다. 바닥에는 썩은 고기 냄새가 더욱 진동했다.
혁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탄총을 들었다. “젠장, 이제 한 발 남았어.”
강민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더 찾아보면 돼.”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탄약은 이제 황금 제국의 사치품이었다. 벽 바깥의 평민들에겐 총알 한 발조차도 생존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겨우 낡은 통조림 몇 개와 너덜너덜한 천 조각들을 찾아냈다. 소득이라고 하기엔 초라했지만, 이것이라도 없으면 내일은 없었다. 그들이 폐허를 빠져나와 잿불 연대가 모여 사는 움막촌으로 향할 때였다.
멀리서 번쩍이는 금빛 갑옷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금 제국의 순찰대였다.
“젠장, 재수 없게.” 상구가 욕설을 뱉었다.
“숨어!” 강민이 급히 지시했다.
그들은 무너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황금 제국의 병사들은 빛나는 갑옷을 입고, 최신형 총기로 무장한 채 거들먹거리며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녹슨 수레가 끌려오고 있었는데, 수레 위에는 갓 잡은 야생 사슴 두 마리가 실려 있었다. 놈들이 이 외곽까지 나와 사냥을 했다는 뜻이었다. 벽 안의 귀족들을 위한 식량일 터였다.
병사 중 한 명이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움막촌 방향으로 향했다.
“여봐라, 저쪽에서 썩은 내 안 나냐? 저 천민 새끼들이 또 시체를 쌓아놓고 있겠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병장님. 어차피 굶어 죽을 것들입니다.” 다른 병사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놈들 시체는 놈들에게나 좋은 거름이겠죠.”
그들의 대화는 마치 이 바깥 세상의 모든 고통이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무심하고 오만했다.
강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손톱이 하얗게 질렸다.
혁준이 강민의 어깨를 잡았다. “참아, 강민아.”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민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도, 아빠도 다 제국이 보낸 약탈병들 때문에 죽었어요. 놈들이 막지만 않았으면… 놈들이 총알이라도 줬으면…”
수진은 민아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또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들은 은신처에서 벗어났다.
강민의 눈은 이미 저 멀리,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제국의 성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더 이상 참지 않아.” 강민이 나지막이, 하지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겠다는 거야?” 혁준이 물었다.
“놈들이 우리에게 준 것은 절망뿐이었다. 이제 우리가 놈들에게 절망을 돌려줄 때다.” 강민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졌다. “잿불 연대를 모아. 오늘 밤, 우리는 결정할 거야. 이 거지 같은 삶을 끝낼지, 아니면 더 큰 불을 피울지.”
움막촌은 낡은 천막과 폐허에서 가져온 나무판자로 겨우 형태를 갖춘, 끈질긴 생명력의 증거였다. 밤이 되자 작은 모닥불 몇 개가 타오르고 있었고, 그 주위로 지친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강민과 일행이 돌아오자, 몇몇 아이들이 달려와 통조림을 보고 환호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강민은 모닥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낮의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강렬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모두 들어라!” 강민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오늘 우리는 또 다시 황금 제국의 병사들을 만났다. 놈들은 우리를 굶주린 짐승 보듯 비웃었다. 우리가 힘들게 찾은 식량은 쥐꼬리만 한데, 놈들은 산 사슴 두 마리를 싣고 있었다. 벽 안의 귀족들을 먹일 사냥감이었다!”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분노와 체념이 뒤섞인 목소리들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놈들의 노리개가 되고, 놈들이 버린 찌꺼기를 주워 먹으며 연명해야 하는가? 우리 중 몇몇은 놈들의 총에 맞아 죽고, 또 다른 이들은 놈들이 막아버린 길 때문에 굶어 죽었다! 놈들이 보급을 끊어버려서 병든 아이들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강민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제국은 우리를 외면했다! 아니, 외면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죽이고 있다! 놈들에게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놈들에게 우리는 숫자에 불과하다! 놈들에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침묵이 흘렀다. 모닥불의 불꽃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민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단호하게 외쳤다.
“이제 끝내자! 이 굴종의 사슬을 끊어버리자! 우리는 더 이상 놈들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다! 우리는 잿불 연대다!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혁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강민 말이 맞아! 이대로는 못 살아! 싸우자!”
상구도 그의 옆에 섰다. “내 망치로 놈들 대가리를 부숴버릴 거야!”
민아가 작은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우리 엄마, 아빠의 복수를 해야 해!”
하나둘씩, 사람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체념과 절망의 그늘이 걷히고, 그 자리에는 뜨거운 분노와 희망이 피어났다.
“싸우자!”
“복수하자!”
“죽느냐 사느냐, 끝장을 보자!”
외침이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강민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빛나는 황금 제국의 성벽을 바라봤다. 그곳은 억압과 탐욕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할 터였다. 폐허 속 잿불 연대의 작은 불씨가, 거대한 제국을 태워버릴 들불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