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서울 변두리, 낡은 아파트 숲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신축 주상복합. 그중 23층 한 칸에 이진우가 살았다. 햇살 좋은 남향에 고층이라 전망도 꽤 근사했다. 적어도, 그 일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처음엔 사소했다. 열쇠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엉뚱하게 냉장고 위에서 발견되는 식이었다.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밤에는 형광등이 깜빡이는 일이 잦아졌다. 전등 교체 기사를 불렀지만,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멀쩡한데요? 전압도 안정적이고…”

어느 날 아침, 진우는 식탁 위 커피잔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발견했다.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고양이라도 키워야 하나, 환영을 보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침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책들이 서재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내용물이 쏟아진 채였다.

“도둑인가?”

그는 덜컥 겁이 났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혹시 모를 침입의 흔적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현관문 잠금장치는 멀쩡했다.

그때부터 섬뜩한 기운이 아파트 전체를 휘감았다. 밤에는 씽크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물은 잠겨 있었다. 샤워기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가 하면, 복도에서는 누군가 쿵, 쿵,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 소리를 키웠지만, 쿵, 쿵 하는 소리는 음악 소리를 뚫고 들어왔다. 그의 심장 박동과 묘하게 겹쳐졌다.

점점 더 기이해졌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분명 아침에 잠가두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세면대 거울에는 손가락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 유리에 대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던 것처럼. 진우는 이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서 무언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형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환영에 시달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진우는 휴대폰을 쥐고 벌벌 떨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다. “혹시 이 아파트… 전에 무슨 일 있었나요?” 중개업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라뇨? 진우 씨가 첫 입주잖아요! 흠 없는 새 아파트예요.”

새 아파트? 진우는 중개업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아파트엔 숨 쉬는 모든 것을 압박하는 기묘한 기운이 가득했다. 무언가, 그 무엇이 자신을 옥죄고 있었다.

어느 밤, 진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책장에 꽂혀 있던 묵직한 백과사전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 작은 화분, 액자들이 하나둘씩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내동댕이쳐졌다.

“젠장!”

진우는 소리를 질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은 더 이상 건망증이나 환영으로 치부할 수 없는 명백한 폭력이었다. 그는 현관문으로 달려가 잠금장치를 풀려 했다. 그때, 뒤에서 섬뜩한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가지 마.’

낮고 쉰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차가운 손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는 듯했다. 진우는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압력에 숨이 막혔다. 그는 고개를 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색 염주가 맹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진우의 외할머니가 어릴 적 그에게 ‘지켜줄 것’이라며 건네준, 평소엔 그저 까만 돌멩이일 뿐이던 염주였다. 염주는 붉은 빛을 내뿜으며 진동했고, 그 빛은 그의 등 뒤를 향해 뻗어나갔다.

“크아아악!”

등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우는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 앞 복도에, 검은 그림자가 일그러진 채 서 있었다. 마치 사람의 형상을 흉내 낸 듯했지만, 끊임없이 일렁이며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림자가 진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심장이 다시 조여 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목의 염주를 움켜쥐었다. 염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강렬하게 공간을 채웠다. 그림자는 그 빛을 맞자마자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물러났다.

‘누구냐… 너는…!’ 그림자에게서, 아니 그림자 너머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진우의 뇌리를 강타했다. ‘내 터전을… 내 평화를… 감히…!’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외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진우 너는 남들보다 기운이 더 세. 좋은 기운은 아니야. 그래서 조심해야 해. 이 염주가 널 지켜줄 거야. 나쁜 기운이 널 흔들지 못하게.”

그때였다. 진우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염주가 그의 손안에서 맹렬히 진동하며, 그의 숨겨진 기운을 일깨우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그의 눈에는 검은 그림자가 단순한 어둠으로 보이지 않았다. 일그러진 형체 속에 갇힌, 고통받는 존재의 원한이 느껴졌다.

“네 터전?”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내 아파트야.”

그림자가 기괴하게 웃었다. ‘네 아파트? 하찮은 인간의 거처! 이곳은 수백 년 전부터 나의 정원이었고, 나의 잠자리였다! 너희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워 나의 안식을 깼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야!’

그림자의 비명은 더 이상 그의 귀가 아닌, 그의 영혼을 직접 파고들었다. 진우는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염주가 그의 손에 단단히 박힌 듯했다. 그는 손목을 들어 올렸다. 염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향해 뻗어나갔다.

“너의 안식을 깬 건 미안하지만,” 진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해를 끼칠 수는 없어.”

그림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멈칫했다. ‘감히… 기운이… 느껴진다… 네놈에게서… 잊었던… 고귀한 기운이…!’

그림자는 더 이상 그를 공격하려 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듯 일렁였다. 진우는 염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열기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연결된 듯한 강렬한 에너지였다. 외할머니가 말했던 ‘기운’이 바로 이것일까?

진우는 그 기운을 집중했다. 염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더욱 강렬해지며, 그림자를 둘러쌌다. 그림자는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쳤지만, 이내 그 빛 속으로 천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먼지가 햇살 아래 소멸하는 것처럼.

‘아아… 평화로워라… 고통이… 사라진다…’

그림자의 마지막 속삭임이 진우의 영혼에 닿았다. 그것은 더 이상 원한이 아니었다.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는 존재의 안도감이었다.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아파트 안의 모든 기괴한 현상이 멈췄다. 형광등은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고, 차가운 냉기도 사라졌다. 집안을 짓누르던 음습한 기운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왠지 모를 상쾌한 공기가 가득 찼다.

진우는 휘청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손목의 염주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눈을 감자, 여전히 자신의 몸 안에서 강렬하게 뛰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마치 잠자고 있던 거인이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 불빛으로 가득 찬 도시의 밤풍경이 펼쳐졌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번잡한 풍경으로 보였을 테지만, 이제 진우의 눈에는 달랐다. 도시의 빌딩 숲 사이사이로, 땅의 기운이 흐르고, 밤공기 속에서 희미한 영기가 춤추는 것이 보였다. 그의 아파트, 아니 그의 ‘터전’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목의 염주를 매만졌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 속에서도 미묘한 흥분과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제 그는 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삶은 이 아파트 23층에서 완전히 새로운 막을 열었다.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신선의 기운이, 현대 도시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깨어난 것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