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검은 제국의 심장, 그 균열의 끝에서
철의 제국. 그 이름처럼 강철로 만들어진 듯 단단하고 차가운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수도 강철궁의 심장부, 기록보관소는 제국의 모든 시간을 삼킨 채 숨 쉬는 거대한 관처럼 고요했다. 오래된 서책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는 이곳의 공기 그 자체였다. 빛 한 줄기 제대로 들지 않는 창 없는 방에서, 이하진은 낡은 양피지 위에 빼곡히 쓰인 글자들을 더듬었다. 붓 끝이 떨리는 것은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위대한 업적’, ‘제국 번영의 찬란한 역사’. 기록보관소에 비치된 모든 서책은 한결같이 제국의 영광만을 노래했다. 하지만 하진이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는 이 금서—어느 이름 없는 사관이 목숨을 걸고 기록했던 단편적인 역사—는 달랐다. 행간마다 고통과 절규가 스며 있었고, 검은 제국의 영광 아래 짓밟힌 수많은 민초의 피울음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서력 203년, 겨울.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그날, 제국의 병사들은 굶주린 이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그들의 죄목은 ‘반역’이었다. 허나, 그들의 유일한 죄는 ‘살아남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책에 따르면, 지금 그녀가 살고 있는 ‘철의 제국’은 과거 번성했던 수많은 소국을 병탄하고 피와 살을 밟고 일어선 거대한 폭군이었다. 그녀가 익히 배워왔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이 모든 거짓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창밖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기록보관소 안은 항상 빛과 어둠이 혼재된 모호한 공간이었다. 낡은 등불만이 불안하게 깜빡이며 하진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녀의 손끝이 책갈피에 끼워져 있던 작고 투박한 돌멩이에 닿았다. 검은색 오석이었다. 아무런 문양도, 특별한 장식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돌멩이. 하지만 이 돌은 하진의 증조부가 물려준 유품이었다. 증조부는 그녀에게 이 돌멩이를 주며 늘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너무나 암울하고, 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일 때, 이 돌을 쥐고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거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해 줄 것이니.” 하진은 그 말을 그저 미신으로만 치부해 왔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바깥 세상에서는 여전히 제국의 병사들이 식량을 약탈하고, 반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진 자신이 보아온 것만으로도, 제국의 치세는 결코 ‘찬란’하지 않았다. 부패와 착취, 거짓으로 얼룩진 시궁창이었다. 이 모든 부조리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숨 쉴 수가 없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진의 손이 저도 모르게 검은 오석을 움켜쥐었다. 차갑던 돌멩이가 순간 미약한 온기를 띠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간절히 바랐다. 이 부패한 제국이, 이 고통받는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이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다면… 그녀의 마음속에서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간절한 염원이 거대한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그때였다.
쥐고 있던 오석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하진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혹은 거대한 해류에 휩쓸려 가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 전신을 찢어발겼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눈앞의 세상은 조각난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암전.
***
“이봐, 거기 아가씨! 괜찮아? 정신 좀 차려 봐!”
귓가에 맴도는 시끄러운 소음과 익숙하지 않은 악취에 하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기록보관소와는 180도 달랐다.
햇빛이 쨍하게 쏟아지는 거리.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닥.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낡은 삼베옷을 입고, 저마다 바구니나 봇짐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 왁자지껄한 시장통의 활기 속에선 생선 비린내, 구수한 장터 국밥 냄새, 그리고 온갖 잡다한 향신료의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어… 어딘가요, 여기는…?”
하진의 질문에,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굵은 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이었다.
“어딘가라니, 여기는 동쪽 장터 아니겠소? 술이라도 드셨수? 아님 어디 아프시오?”
동쪽 장터? 하진은 제국의 수도에 동쪽 장터 같은 이름의 시장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시장은 모두 제국에서 지정한 엄격한 규율 아래 운영되는 ‘관리 시장’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을 일으키려 애쓰자, 욱신거리는 팔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팔뚝에는 붉은 멍 자국이 선명했다. 마치 어딘가에 부딪혀 떨어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사람들의 복식은 그녀가 역사서에서 보던 아주 오래전의 그것과 흡사했다.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보였지만, 그들의 갑옷은 하진이 알던 제국의 병사들 갑옷과는 달랐다. 더 투박하고, 덜 세련된. 마치… 미완성된 갑옷 같았다.
그때, 저 멀리서 날카로운 징소리가 울렸다.
“제국의 법도에 따라, 죄인의 처형을 집행한다!”
그 목소리에 장터의 활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하진도 반사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광장 중앙, 높다란 나무 기둥에 묶인 세 명의 남자. 그들의 몸은 피투성이였고, 눈빛은 이미 삶을 포기한 듯 흐릿했다. 그들 앞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병사들 중 하나가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죄목을 읽어 내려갔다.
“이 세 역적은 제국의 곡식을 빼돌리고 백성을 선동하여 반역을 꾀했으니,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능지처참에 처한다!”
하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능지처참! 그녀의 시대에는 이미 사라진 잔혹한 형벌이었다. 그리고 ‘역적’, ‘반역’… 이 단어들은 그녀가 읽던 금서에서 수없이 보았던 단어들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녀의 머릿속으로 박혀들었다.
‘설마… 시간이동?’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읽던 금서에서 묘사된 시대, 제국의 폭정이 극에 달했던 그 시절로 떨어진 것 같았다. 묶여 있는 이들의 모습은, 그녀가 읽던 책 속의 ‘반란을 꾀한 백성’과 다름없었다.
그 순간, 한 병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창을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병사들의 구호와 함께, 창날이 죄인의 몸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진은 비명을 삼켰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참혹한 광경에 그녀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주저앉아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하진의 귓가에, 주변 사람들의 웅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쯧쯧… 또 누가 끌려갔다더니, 저렇게… 저러다 우리도 다 죽는 거 아니겠어?”
“쉿! 조용히 하게! 귀가 없는 줄 아나! 병사들이 듣기라도 하면…!”
“저러니 반란군이 끊이지 않는 게지… 어휴… 도대체 이 지옥 같은 세상은 언제나 끝날까.”
하진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공포와 함께 체념, 그리고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바로 그녀가 읽던 책 속에서 묘사되던, 제국의 폭정에 시달리는 평민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정말 과거로 온 건가?’
하진의 시선이 다시 처형대로 향했다. 피가 흥건한 바닥. 고통스럽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무감각한 병사들.
그 순간, 하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처형대를 뚫어지라 응시하는 한 여인을 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두려움 대신, 거대한 증오와 결의가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 지옥 같은 과거로 떨어진 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쩌면 저 여인의 눈빛 속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검은 오석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빛도, 온기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돌멩이처럼, 하진의 손바닥에서 차갑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진의 심장은, 이제 막 거대한 파문에 휩쓸린 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염원했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일까.
아니면… 더 거대한 절망의 시작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