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골의 심장
잿빛골은 언제나 잿빛이었다. 흙먼지 낀 하늘 아래, 비쩍 마른 바람이 낡은 초가 지붕 위를 맴돌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흙먼지에 파묻힌 지 오래. 이곳에 남은 것이라곤 고된 노동과 한없이 식어가는 희망, 그리고 썩은 내가 나는 가난뿐이었다. 돌멩이 하나도 제대로 된 주인을 찾지 못하고 굴러다니는 황량한 마을은, 거대한 아우레스 제국의 심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잊힌 그림자 같았다.
카인은 낡은 오두막 앞에서 쪼그려 앉아 부러진 농기구를 고치고 있었다. 땀방울이 흙먼지와 뒤섞여 그의 메마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톱 밑에 박힌 거친 흙은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삶의 흔적이었다. 안에서는 끙끙 앓는 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왔다. 여섯 살 된 여동생 리안이었다. 며칠 전부터 열이 끓었지만, 제대로 된 약조차 구할 수 없었다. 제국의 법도에 따라 모든 귀한 약재는 제국군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고, 평민에게 허락된 것은 썩어가는 약초나 효능 없는 민간요법뿐이었다.
“리안아, 괜찮아? 형 여기 있어.”
카인은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답 없는 메아리만이 그의 심장을 죄어왔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리안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한 줌 남은 보리쌀을 끓여 죽이라도 먹여야 할 텐데, 쌀이 담긴 낡은 솥단지마저 어쩐지 불안하게 보였다.
그때, 저 멀리 메마른 길이 먼지 기둥을 뿜어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잿빛골의 고요를 깨고 점점 가까워졌다. 이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그림자였다. 붉은 태양 문양의 아우레스 제국 깃발을 든 기마병들. 잿빛골 주민들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드리워졌다. 수확기마다 나타나 쥐꼬리만 한 소출마저 몽땅 앗아가는 제국의 심장이자 칼날. 그들의 발굽 아래 잿빛골은 매번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두 나와라! 제국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너희 평민들에게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징수령이 떨어졌다!”
선두에 선 자는 검붉은 갑옷을 입고, 흉터 가득한 얼굴에 비웃음을 머금은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크라실 감찰관’. 제국 변방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로 악명 높은 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벼락 같았고, 병사들은 주민들을 거칠게 밀치며 가가호호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잿빛골의 낡은 문들이 비명을 지르듯 부서져 나갔다.
“뭘 꾸물거리는가! 곡물은 물론이요, 가축! 심지어 마굿간의 썩은 건초 한 줌까지 모조리 끌어 모아라!”
크라실의 명령에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뛰었다. 낡은 곡식 창고는 삽시간에 털렸고, 겨우 몇 마리 남은 가축들은 비명을 지르며 끌려갔다. 주민들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거나,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채찍과 곤봉이 사정없이 그들의 등을 갈랐다.
카인은 안에서 들려오는 리안의 가쁜 기침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병사 하나가 카인의 오두막 문을 발로 걷어찼다. 낡은 나무 문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나갔다.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 뭘 숨겨두었느냐!”
건장한 병사가 거친 손으로 오두막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인은 그를 막아섰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병사는 카인의 말을 무시하고 발로 솥을 걷어차 뒤집었다. 겨우 몇 줌 남은 보리쌀이 흙바닥에 흩뿌려졌다. 리안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유일한 양식. 카인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런 개자식들이…!”
카인이 주먹을 꽉 쥐는 순간, 뒤에서 날아온 곤봉이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억눌렸던 분노가 터져 나오려 했지만, 이성 한 조각이 간신히 그를 붙잡았다. 저들에게 대들었다간 리안마저 위험해질 터였다. 그는 쓰러진 채 바닥에 흩어진 보리쌀을 바라봤다. 흙먼지에 뒤섞여 더는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된 보리쌀이, 리안의 희미한 미래처럼 부서져 있었다.
그때, 촌장 할아버지가 옆에 쪼그려 앉아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깊은 주름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알 수 없는 결의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괜찮으냐, 카인….”
“괜찮기는요. 리안은 이제 뭘 먹고… 뭘 먹고 산답니까…!”
카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애써 참았다.
“제국은… 제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게다. 그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피와 살점뿐이지.” 촌장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할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먼 산을 응시했다. 그 시선 끝에는 저물어가는 해가 잿빛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카인은 그 불타는 하늘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엇을 본 것 같았다.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 같은 것.
그날 밤, 잿빛골은 텅 비어버린 창고처럼 고요했다. 모든 것이 약탈당하고, 몇몇 젊은이들은 강제로 끌려갔다. 리안의 열은 더욱 심해졌다. 카인은 오두막 구석에 앉아 차가운 손으로 리안의 이마를 짚었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숨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어두운 오두막 안에서 리안의 얼굴은 창백하게 빛났다.
“미안하다, 리안아… 형이 너무 나약해서….”
그때, 카인의 시선이 흙바닥에 떨어진 무언가에 닿았다. 병사들이 솥을 걷어찰 때 부서진 나무 조각이었다. 낡은 솥의 바닥을 지탱하던 나무 손잡이. 마치 깎아놓은 작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단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조용히 그 조각을 주워들었다. 낡고 보잘것없는 나무 조각이었지만, 그의 손에 쥐이자 어쩐지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리안의 가쁜 숨소리가 그의 귀에 박혔다. 카인은 그 나무 조각을 꽉 쥐었다. 부서진 나무 조각은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아픔이 밀려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고통과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결의로 가득 차올랐다.
‘제국… 반드시….’
카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더는 나약하게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고.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겠다고. 어린 여동생을 위해,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짓밟힌 모든 이들을 위해,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잿빛골의 고요를 깨고, 카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잠들었던 거인이 깨어나는 것처럼.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카인은 오두막을 나섰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하늘 아래, 그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졌다. 그의 손에는 전날 밤 주워든 나무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조각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과 함께 뛰는 작은 칼날이자, 다가올 폭풍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였다. 잿빛골은 이제 더 이상 잿빛으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