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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의 제단: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천 년의 침묵이 갇혀 있던 비좁은 통로를 벗어나자, 드디어 그들이 찾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혁은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횃불을 높이 들었다. 붉고 불안정한 불꽃이 거대한 암흑 속으로 길고 춤추는 그림자를 던졌다.

“이게… 대체.”

하윤의 목소리가 경외감과 함께 섞여 나왔다. 그녀는 손에 든 소형 스캐너를 든 채 넋을 잃은 듯 앞을 응시했다. 강 팀장 역시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지름 수십 미터에 달하는 원형의 거대한 암석 홀이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아 횃불의 빛조차 닿지 않아 검은 심연으로 보였고, 바닥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홀의 중앙에는 지름 족히 5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원형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의 표면에는 지금까지 그들이 발견했던 어떤 문양과도 다른, 기묘하고 뒤틀린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우리가 지금까지 본 벽화랑 달라요. 훨씬 더 오래된 것 같습니다.” 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이미 제단 위의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존재에 대한 기록일 수도.”

강 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존재라니? 설마 우리가 찾던 그 존재 말인가?”

이 지하 유적 전체를 지배하는, 혹은 지배했던 미지의 고대 존재. 그들은 그 존재의 흔적을 쫓아 며칠 밤낮으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스캐너가… 작동하지 않아요.” 하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아예 신호 자체가 잡히질 않아요. 무슨 강력한 자기장 같은 게… 아니면.”

그녀의 시선이 제단 위를 훑었다. 지혁은 손전등을 꺼내 제단 중앙에 가장 크게 새겨진 문양을 비췄다. 뱀처럼 뒤틀린 형상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눈동자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 듯했다. 단순히 추상적인 문양이 아니라, 무언가 생명을 가지고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이건… 기호가 아니야.” 지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건… 봉헌문이야.”

“봉헌문?” 강 팀장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뭘 봉헌한다는 거지?”

지혁은 제단 주위를 천천히 돌며 손전등으로 문양들을 훑었다. 그의 손가락이 표면을 스치자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이건… 어떤 존재에게 바치는 기도이자, 동시에 경고문입니다. ‘눈을 뜨게 하지 마라. 잠자는 이를 깨우지 마라. 기억을 탐하는 자, 스스로의 영혼을 바치리라.’”

그 순간, 홀 안의 횃불이 갑자기 ‘팟!’ 하고 꺼졌다. 완벽한 암흑. 하윤의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야! 강 팀장님, 손전등!”

강 팀장이 허둥지둥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빛이 홀 안을 비추자,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암흑은 그저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주위를 짓누르는 압력으로 다가왔다.

“방금… 빛이 왜 꺼진 거죠?” 하윤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습기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횃불은 분명 견고하게 박혀 있었고, 갑자기 꺼질 만한 어떤 환경적 요인도 없었다.

그때, 제단 중앙의 문양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약하게,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저게… 움직여요!” 하윤이 손가락으로 제단을 가리켰다.

빛은 점점 강해지더니, 이내 어둠을 가를 정도로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섬뜩할 정도로 붉고 푸른빛이 교차하며 문양 사이를 흘렀다. 뒤틀린 뱀 형상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지혁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이 읽은 문양이 단순한 글귀가 아니었다. 그것은 봉인된 존재에게 바쳐지는 ‘주문’이자, 동시에 ‘스위치’였다. 그들이 발음하고 해석하는 순간,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윤 씨, 팀장님!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서!” 지혁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쉬이이익…’

갑자기 홀 중앙의 제단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수천 마리의 뱀이 동시에 몸을 비비는 듯한 소리였다. 제단 표면의 돌들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문양 사이에서 검고 끈적한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액체는 흐느적거리며 흘러내렸고, 기분 나쁜 비린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오한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뭐야…?” 강 팀장의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그 액체는 제단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그 액체가 닿는 곳마다, 검은 돌바닥에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뻗어 나가며 홀 전체를 뒤덮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제단 중앙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연기는 천장까지 닿을 듯이 치솟아 오르더니, 이내 어떤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태가 없으면서도 모든 형태를 가진 듯했다. 칠흑 같은 어둠의 덩어리였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눈동자들이 번뜩였다. 그 눈동자들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절망, 그리고 잊혀진 기억들을 담고 있는 듯했다. 존재 자체로 공간을 왜곡시키고,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도망쳐…!” 지혁의 목소리가 겨우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가 그들의 몸을 짓눌러왔다. 그 존재는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수한 눈동자 중 하나가 그들 각자의 시선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순간들, 죄책감, 후회, 그리고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

“안 돼…! 이건… 기억을… 빼앗아가는 거야…!” 지혁이 온몸을 떨며 소리쳤다.

검은 연기의 촉수가 홀 안에 가득 퍼져나가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차가운 촉수가 살갗을 스치자, 그들은 과거의 환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세상이 뒤틀렸다.

마지막으로 지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연기 속에서 거대하게 펼쳐지는 제단 위 문양이었다.

‘기억을 탐하는 자, 스스로의 영혼을 바치리라.’

그 문구가, 이제는 그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지워지지 않을 경고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경고는, 바로 지금, 현실이 되어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미지의 존재가 정말로 그들의 기억을 전부 집어삼킨다면, 그들은 과연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벗어나더라도, 과연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비명은, 곧 망각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