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창문을 막아둔 판자 틈새로 가늘게 새어 들어와, 먼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작은 빛의 기둥을 만들었다. 유진은 희미한 빛을 등지고 앉아, 낡은 천 조각을 꿰매고 있었다. 바늘이 뻑뻑한 천을 통과할 때마다 작게 ‘스윽’ 소리가 났다. 벌써 몇 번째 덧대어 기운 옷인지 모르겠다. 실타래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니, 오늘도 나가?”
작은 목소리가 잠을 깬 방 안의 정적을 깼다. 수아는 낡은 담요를 둘둘 만 채로 앉아, 반쯤 감긴 눈으로 유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볼에 붙어 있었지만, 그 작은 얼굴은 여전히 잠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유진은 미소 지으며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수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거칠었지만, 움직임은 더없이 섬세했다. “응. 식량이 많이 줄었잖아. 저번에 봤던 허물어진 상점가 쪽으로 가보려고.”
수아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위험하잖아. 지난번에 언니 다쳐서 왔잖아.”
“걱정 마. 이번엔 더 조심할게. 그리고 상점가 안쪽까지 가진 않을 거야. 겉에 남아있는 것들만 후딱 보고 올게.” 유진은 수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어제 잠들기 전 확인한 식량 저장고의 텅 빈 모습이 깊이 박혀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내일 당장 식탁에 올릴 것이 없다는 현실은 늘 유진의 어깨를 짓눌렀다.
수아는 한숨을 쉬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언니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구석에 놓아둔 낡은 주전자와 손잡이 없는 컵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럼 내가 언니 다녀올 동안 물 끓여놓을게. 따뜻한 차 마시고 싶다.”
“그래, 따뜻한 차. 좋지.” 유진은 수아의 작은 등 뒤를 보며 중얼거렸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따뜻한 차’라는 말은 사치스러울 만큼 평화로운 단어였다. 그 한 모금의 온기가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여주는 것 같았다.
유진은 낡은 배낭을 챙겼다. 칼날이 무딘 손도끼, 구멍 난 곳을 막아둔 물통,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철사 몇 가닥. 배낭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안전화 끈을 단단히 묶고, 해진 외투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밖은 여전히 서늘했고,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이곳에 밤이 언제 찾아올지, 혹은 해가 언제 다시 뜰지 가늠하기는 이미 오래전에 불가능해졌다.
“나 다녀올게. 문 잠그고 아무한테도 열어주지 마.”
“알았어, 언니. 조심해!”
수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따라왔다. 삐걱이는 문을 닫고 묵직한 빗장을 걸었다. 쇠로 된 빗장이 제자리를 찾자, 익숙하면서도 불안한 고립감이 유진을 감쌌다. 이 작은 공간이 두 사람의 전부였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막아주는 유일한 안식처.
바깥세상은 초록색 괴물에 잠식되어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 위로 덩굴 식물들이 미쳐 날뛰듯 뻗어 있었고, 아스팔트를 뚫고 억센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때는 번화했을 도시의 거리에는 이제 인적 대신 바람 소리만이 울렸다. 바람은 부서진 건물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유진은 익숙하게 꺾인 표지판과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빠르고 조심스러웠다.
오늘 목적지는 서쪽으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부분적으로 붕괴된 상가 건물이었다. 예전에는 식료품점과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운이 좋다면 폐기된 통조림이나, 버려진 공구 같은 것을 찾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저 먼지 쌓인 캔 조각이나 찢어진 옷가지들만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매번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길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삭막한 외벽은 거대한 갈색 덩굴에 뒤덮여 있었고, 간판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철제 간판 조각들은 붉게 녹슬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고요함이 때로는 날카로운 비명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건물의 내부로 향하는 가장 만만한 틈새를 찾았다. 굳게 닫힌 셔터 옆, 폭격으로 생긴 듯한 커다란 구멍이 눈에 띄었다. 먼지 섞인 바람이 그 안에서 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구멍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콘크리트 조각들이 발밑에서 부스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내부는 폐허 그 자체였다. 선반은 쓰러져 있었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유진은 휴대용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탐색했다. 빛이 닿는 곳마다 과거의 흔적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텅 비어버린 캔들, 바싹 마른 과자 부스러기, 물에 젖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종이 뭉치들.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돌아가면 수아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오늘은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때, 저편 어두운 구석에서 무언가가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먼지에 뒤덮인 채 비스듬히 넘어져 있는 냉장고가 보였다. 오래전에 모든 기능을 잃어버렸을 낡은 냉장고. 어쩌면…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망이 유진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냉장고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은 이미 부패한 냄새로 가득했지만, 구석에 버섯처럼 돋아난 곰팡이들 사이로 작은 캔 하나가 먼지에 쌓인 채 놓여 있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캔을 잡았다. 겉면에 적힌 글씨는 거의 지워져 있었지만, 동그란 과일 그림은 여전히 희미하게 보였다. 복숭아 통조림.
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썩지 않은 통조림이라니! 이것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었다. 수아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작은 기쁨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캔을 배낭에 넣고,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했다. 이 작은 발견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했다. 욕심을 부리다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이 세상의 철칙과도 같았다.
밖으로 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다. 초록색 덩굴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마치 거대한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이 예전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풀숲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순간 몸을 낮추고 손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격렬하게 뛰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생존자? 아니면… 위험한 짐승?
잠시 후,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갈색 털을 가진 작은 토끼 한 마리가 풀잎을 뜯어 먹다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안도감과 동시에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젠 토끼 한 마리에도 이렇게 놀랄 만큼 겁이 많아졌나.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경계심이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낡은 문틈으로 수아가 흥얼거리는 작은 노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진은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작은 노랫소리가 세상의 모든 비명과 절망을 잠재우는 주문처럼 느껴졌다.
빗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수아는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나무 조각을 떨어뜨렸다. 작은 나무 인형을 깎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언니! 벌써 왔어? 다친 데는 없어?”
유진은 배낭을 내려놓고 활짝 웃었다. “응, 무사히 돌아왔지. 그리고 이거 봐라?”
배낭에서 복숭아 통조림을 꺼내 보이자, 수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그 작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복숭아! 와, 언니 최고! 이걸 어디서 찾았어?”
“비밀이야. 대신 오늘 저녁은 이거다!”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과일 통조림은 세상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값지고 맛있었다. 찌그러진 캔을 따서 조심스럽게 나눠 먹으며, 둘은 조용히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복숭아 조각 하나하나가 입안에서 녹아내릴 때마다,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희미한 행복이 가슴 가득 퍼지는 것을 느꼈다.
밤이 깊어지자,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작은 방 안은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수아는 낡은 담요를 덮고 잠이 들었고, 유진은 그 옆에 앉아 작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낡은 지도를 펼쳤다.
지도 위에는 아직 탐사하지 못한 미지의 구역들이 옅게 표시되어 있었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유진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곁에서 새근새근 잠든 수아의 숨소리가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아이를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짚어가며, 유진은 생각했다. 이 황량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이 작은 기적의 연속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기적을 함께 만들어갈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을.
녹색의 그림자 아래, 두 자매의 작은 희망은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