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뼈에 스몄다. 무릎까지 차오른 끈적한 이물질이 발목을 잡아끌었다. 카인의 시야 필터가 자동 보정되며 미약한 잔광을 증폭시켰지만, 거대한 홀을 가득 채운 그림자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는 비릿한 철과 썩은 흙냄새로 가득했고, 그 아래 알 수 없는 고대 기계의 침묵이 웅장하게 깔려 있었다.
“젠장, 끝이 없잖아.”
카인이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증강된 음향 센서를 통해 전달되었지만, 공기 중의 습기가 미묘하게 음파를 왜곡시켰다. 사이버네틱 팔을 뻗어 축축한 벽을 짚자, 차가운 돌덩이가 손바닥에 닿는 감각이 신경망을 타고 전해졌다. 수백, 아니 수천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고대의 조각들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었다. 표면은 부식되었지만, 한때 이곳을 지배했던 문명의 광기와 웅장함이 묵직하게 배어 나왔다.
[카인, 전방 300미터 지점에서 대규모 에너지 반응이 감지돼. 지금까지 스캔된 것과는 차원이 달라.]
귀 안의 임플란트를 통해 세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카인의 후방 10미터 지점에서 손목에 부착된 데이터 슬레이트를 끊임없이 조작하고 있었다. 주황색 홀로그램이 허공에 떠올라 복잡한 그래프와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뿜어냈다.
“좋아,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 이런 개 같은 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지긋지긋했어.”
카인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아래 진흙이 철벅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것은 홀의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칠흑 같은 암석으로 빚어진 모놀리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하려는 듯, 표면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웠지만, 그 안에 잠든 기이한 에너지가 카인의 센서에 강력한 신호로 잡혔다. 미세한 전류가 피부를 타고 흐르는 듯한 감각.
세라가 카인의 옆으로 다가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은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박힌 안경 너머로 모놀리스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가진 모든 데이터베이스에도 없어. 형태 자체는 고대 문명의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데, 에너지 패턴은… 살아있는 것 같아.”
“살아있는 돌덩이라니, 농담이지?”
“농담할 기분 아니야. 봐, 미세한 진동이 느껴져? 표면 아래에서 뭔가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어. 마치… 잠든 거대한 심장 같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홀의 벽면 곳곳에 박혀 있던 정체불명의 장치들이 섬뜩한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낡은 금속과 돌이 부딪히는 듯한, 으스스한 기계음이 저음으로 울리며 공기를 진동시켰다.
[경고. 외부 침입 감지. 시스템 활성화.]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계음은 차갑고 감정 없었다. 고대어로 속삭이는 듯하면서도, 현대의 어떤 인공지능보다도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다.
“젠장! 무슨 짓을 한 거야, 세라?”
“나 아니야! 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어! 이건… 자동 방어 시스템인가? 하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게 활성화될 줄은…”
붉은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더니, 홀의 천장에 박힌 수정체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색 에너지 빔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진흙 바닥을 지졌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습기가 증발하고, 역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해, 카인!”
세라가 소리쳤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거대한 기둥 뒤로 숨었다. 연이어 쏟아지는 빔은 그가 방금 서 있던 자리를 정교하게 지져댔다. 철벅이던 진흙은 순식간에 메마르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카인, 놈들이 우리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어. 홀 안에는 수십 개의 센서가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저 모놀리스가 핵심이야. 저게 모든 걸 제어하고 있어.]
“제어한다고? 그럼 저걸 부수면 되는 건가?”
카인이 기둥 틈으로 몸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야 필터는 적외선 모드로 전환되어, 홀 안의 열원을 빠르게 스캔했다.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에너지 빔의 발사 지점들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야. 저 돌덩이는 그냥 돌이 아니야. 에너지 장막으로 보호되고 있어. 내 스캐너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최소한 도시 하나를 날릴 만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을 거야.”
세라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 그때였다. 모놀리스의 표면이 일렁이더니, 기이한 상형문자들이 번개처럼 피어올랐다. 마치 살아있는 문신처럼 표면을 타고 흐르다가, 홀의 중앙 바닥에 거대한 홀로그램을 투사했다.
그것은… 지도였다.
정확히는, 이 거대한 지하 유적의 전체 구조를 보여주는 입체 지도였다. 복잡한 통로와 미로처럼 얽힌 방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도의 중심에는, 모놀리스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뭐지? 함정인가?”
카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홀로그램을 살폈다. 지도는 단순히 구조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특정 지점들이 붉은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카인. 저건… 길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이 유적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는 길. 하지만 동시에… 경고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세라가 홀로그램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녀의 데이터 슬레이트가 자동으로 지도의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놀라워… 이 지도는 단순히 구조도가 아니야. 에너지 흐름, 방어 시스템, 심지어 특정 구역의 잠재적 위험도까지 표시하고 있어. 마치… 이 유적을 설계한 자가 남긴 가이드처럼.]
“가이드라고? 그럼 저놈들이 우리한테 길을 알려주는 건가? 제정신인가?”
카인은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고대의 방어 시스템이 침입자에게 길을 안내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이 지도를 보면… 이 유적의 최하층에 도달하면, 모든 방어 시스템이 정지될 거라고 암시하고 있어. 대신, 다른 문이 열릴 거야. 우리가 찾던… ‘그것’으로 가는 문이.]
세라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그녀는 화면 속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장 깊은 곳, 가장 어두운 심연에 해당하는 지점이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푸른 빛 주위에는, 붉은색의 경고 신호가 굵게 깜빡이고 있었다.
“최하층이라고? 좋아, 그럼 그리로 가면 되는 건가? 하지만 이 경고는 뭐지?”
카인이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푸른 빛이 가리키는 지점 위로, 고대 문자들이 거대한 해골 형상을 이루며 떠올랐다.
세라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눈이 홀로그램 속 경고문을 해독해냈다.
[이 지점은… ‘창조주의 심장’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그리고… 옆에 주석이 달려있어. ‘죽음이 시작되는 곳이자, 모든 것이 끝나는 곳’.]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홀의 바닥에서 굉음이 울렸다. 모놀리스가 뿜어내던 붉은빛이 사라지고, 대신 깊은 푸른빛이 홀 전체를 가득 채웠다. 에너지 빔은 멈췄지만, 홀의 저편에서 거대한 금속음이 울리며 무언가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도가 가리키는, 더 깊은 심연으로 향하는 통로의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 뒤편에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뜩한 녹색 불빛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수십 개의 눈을 가진 거대한 육족(六足) 기계 괴수였다. 기계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뼈를 울렸다.
“젠장, 환영 인사치고는 너무 과하잖아!”
카인이 으르렁거리며 팔에 내장된 칼날을 뽑아냈다. 날카로운 크롬 합금 칼날이 푸른빛 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였다. 세라는 이미 데이터 슬레이트를 던져버리고, 허리춤에 찬 고에너지 권총을 뽑아 들고 있었다.
유적은 침입자에게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문턱 너머에서, 잊혀진 문명의 가장 끔찍한 비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