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공기가 암자를 휘감았다. 창밖으로는 달빛조차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검은 산의 실루엣을 삼켰고,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바람만이 낡은 창살에 부딪혀 스산한 소리를 냈다. 암자 안, 촛불 하나가 겨우 어둠을 밀어내며 탁자 위 펼쳐진 낡은 두루마리를 비추고 있었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붓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문자는 천 년도 더 된 고어로,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는 천하에 몇 없을 터였다. 먼지 쌓인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두루마리는 단순한 고문서가 아니었다. 닳고 닳은 비단 위에 그려진 그림은 너무나도 기묘하고, 그 내용 또한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고대 수몰 도시, 아틀란…”
진우의 입술에서 나직이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그림의 절반은 거대한 지하 도시의 전경을 묘사하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 도시를 수호하는 듯한 거대한 봉인진과 미지의 존재들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그림 아래 새겨진 고어는 그 도시가 ‘천 년 전, 홀연히 사라진 신선 문명의 마지막 흔적’이자 ‘대지의 심장에 봉인된 미지의 힘을 품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사라진 신선 문명이라니.” 진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저 허황된 전설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그러나 그의 심장은 알 수 없는 열기로 뛰고 있었다. 여태껏 그가 접했던 무수히 많은 고서와 전설들은 대부분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두루마리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 그리고 그림 속 봉인진의 섬세한 묘사는 단순한 허구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림의 한쪽 구석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로 좌표와 함께 봉인진을 해제하는 아주 짧은 주문이 적혀 있었다. 좌표는 이 암자에서 서쪽으로 수천 리 떨어진, 외부인에게는 ‘마의 지대’로 알려진 ‘천둥 골짜기’를 가리켰다.
그곳은 수백 년 전 거대한 지진과 벼락 폭풍으로 인해 지형이 완전히 뒤바뀌고, 강력한 영기 폭풍이 상시적으로 휘몰아쳐 어지간한 고수조차 접근을 꺼리는 험지였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괴이한 변이체가 출몰한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진우는 잠시 망설였다. 평생을 고서에 파묻혀 살아왔지만, 그 또한 일개 수련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발견은 그의 내면에 깊이 잠재되어 있던 모험심을 자극했다.
“혹시… 진짜라면?”
천 년 전의 신선 문명. 대지의 심장. 미지의 힘.
이 단어들은 진우의 머릿속을 맴돌며 그를 유혹했다. 그는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말아 넣었다.
다음날 새벽, 진우는 간소한 짐을 챙겨 암자를 나섰다. 평소라면 며칠은 족히 걸릴 천둥 골짜기까지의 거리를, 그는 경공술과 비행술을 번갈아 사용하며 단 하루 만에 주파했다.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그의 눈앞에 거대한 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르릉! 콰콰쾅!
이름 그대로, 골짜기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천둥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바위 기둥들은 칼날처럼 솟아 있었고,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거칠게 포효했다. 진우는 영기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며 조심스럽게 골짜기 안으로 들어섰다. 상공에는 번개 구름이 낮게 깔려 끊임없이 섬광을 터뜨렸고, 간간이 떨어지는 낙뢰는 주변 지형을 초토화시켰다.
“이런 곳에… 진짜로 그런 곳이 있다고?”
진우는 두루마리에 표시된 좌표와 주변 지형을 비교하며 나아갔다. 수많은 벼랑과 협곡을 지나자, 한 줄기 폭포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물줄기가 수십 길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엄청난 굉음을 냈고, 주변에는 물안개가 자욱했다. 두루마리의 그림에선 폭포 뒤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고 암시하고 있었다.
진우는 망설임 없이 폭포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줄기가 전신을 강타했지만, 그는 능숙하게 영기를 방어막처럼 둘러 감쌌다. 폭포 뒤는 예상대로였다. 거대한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입구는 단순한 바위 동굴이 아니었다.
벽면 가득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복잡한 봉인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 문양들 사이로는 희미한 푸른빛이 번쩍였고,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봉인진의 중앙에는 손바닥만 한 원형의 홈이 파여 있었다.
“이것이… 봉인진의 핵심인가.”
진우는 자신의 배낭에서 오래된 목패 하나를 꺼냈다. 두루마리와 함께 발견된 목패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검은 목패였지만, 그 표면에서는 은은한 영기가 흘러나왔다. 진우는 목패를 봉인진 중앙의 홈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찰칵!
정확히 들어맞는 소리와 함께 목패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봉인진의 문양들이 연쇄적으로 빛을 발하더니, 거대한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벽면이 마치 물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벽면은 안개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그 너머에는 거대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진우는 어렴풋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듯했고, 바닥에는 마치 누군가 지나간 듯한 희미한 발자국 같은 흔적들이 보였다. 공기 중에는 묘한 습기와 함께 알 수 없는 고대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먼지의 냄새도, 흙의 냄새도 아닌, 오직 잊힌 시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향이었다.
진우는 품속에서 야명주를 꺼내 들었다. 야명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부드러운 빛이 통로를 밝혔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자, 그의 발소리가 정적 속에 울려 퍼졌다.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진우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백 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기둥들은 단순한 바위가 아니었다.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조각들 사이에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 미지의 광석들이 박혀 있었다. 천장은 너무나도 높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고,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박힌 듯 영롱한 광석들이 점점이 박혀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진우의 발아래에는 투명한 유리 같은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그 바닥 아래로는… 거대한 도시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웅장한 건축물들, 촘촘하게 연결된 수로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듯한 거대한 보호막.
“진짜였어….”
진우는 숨을 들이켰다. 두루마리가 전설이 아닌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천 년 전 사라진 신선 문명의 흔적, 고대 수몰 도시 ‘아틀란’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투명한 바닥 아래, 도시의 심장부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진우는 보았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바닥을 구성하는 투명한 막 너머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비쳤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어둡고,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마치 바다 깊은 곳의 거대 생물처럼 유유히 움직이는 그 그림자는, 이 고요한 지하 도시에 드리운 거대한 미스터리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진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더 큰 호기심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는 더 깊이, 이 잊힌 세계의 비밀 속으로 발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