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9화

차가운 공기가 허파 깊숙이 스며들었다. 서하는 굳게 닫힌 병실 문 앞에 선 채, 문득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어쩐지 그 위에 아직도 차가운 눈꽃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다. 계절은 이미 깊은 겨울로 접어들었지만, 첫눈이 내리던 그날의 약속은 그녀의 심장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지혁의 상태가 다시 위중해졌다. 안정기에 접어드는 듯했던 그의 심장이 불규칙한 박동을 보이며, 미약하게 붙잡고 있던 생명의 끈을 놓으려 하는 듯했다. 서하는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매일 밤, 그의 곁에서 속삭였다. 잊힌 그의 기억 저편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의 약속을 되뇌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은 심해처럼 공허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하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윤희가 걸어 나왔다. 의사 가운 대신 평범한 코트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윤희는 서하를 발견하고는 지친 미소를 지었다.

"서하 씨, 아직 안 가셨네요. 밤새도록 지혁 씨 곁을 지켰다면서요."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어서요. 괜찮아요, 윤희 선생님." 서하는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윤희는 조용히 서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혁 씨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고 있어요. 심장 기능이 불안정하고, 기억을 관장하는 뇌 활동도… 더 이상은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고, 의료진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서하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미 수없이 들어온 절망적인 소식이었지만, 매번 새롭게 심장을 찢어놓는 고통이었다. 서하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곳에서, 지혁의 앞에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선생님…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요? 지혁이는… 이렇게… 잊고 살아야 하는 건가요? 제가… 제가 지혁이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그날… 제가 조금만 더…" 서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날,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그 언덕에서, 지혁이 그녀를 구하고 쓰러지던 그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죄책감은 시들지 않는 겨울 눈꽃처럼 그녀를 옥죄었다.

윤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서하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지혁 씨는 서하 씨를 너무 사랑했고, 그 선택은 지혁 씨의 몫이었어요. 그리고…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서하는 깜짝 놀라 윤희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무슨 방법인데요?"

"아주 위험한 시술이에요. 지혁 씨의 뇌 활동을 강제로 자극해서 기억을 되살리는 시도인데… 성공 확률이 극히 낮고, 자칫하면 현재의 상태마저도 되돌릴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어요. 생명에도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윤희의 목소리에는 깊은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지혁 씨는 곧…"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죽음. 그 단어가 다시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망설일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지혁이에게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잡아야 해요. 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요. 그가… 그가 살아만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함으로 가득 찼다.

"서하 씨…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이건 정말…"

"그날의 약속이 아직 제 가슴에 남아있어요, 윤희 선생님.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 둘이 함께라면 겨울 눈꽃처럼 시들지 않을 약속.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 서하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그때, 창밖으로 하얀 눈송이 하나가 덧없이 날아왔다. 첫눈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첫눈보다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눈송이는 마치 그들의 약속처럼,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굳건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혁의 따스한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던 그날. 하얀 눈밭 위에서, 수줍게 웃으며 그녀에게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하야,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우리 겨울 눈꽃처럼 영원히 함께하자."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이제 그녀가 그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의 기억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그를 살려내야 했다. 그가 살아야만, 그들의 약속도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서하는 다시 윤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 그 시술… 지혁이에게 꼭 해 주세요. 제 모든 것을 걸고, 그와 함께할게요."

윤희는 서하의 눈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시 의료진과 상의해 볼게요."

윤희가 돌아선 후, 서하는 다시 지혁의 병실 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밖에서는 하얀 눈송이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눈이 아닌데도, 세상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약속처럼, 순수하고 변치 않는 색으로.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얹자, 서늘한 기운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지혁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서하는 그의 침대 곁에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지혁아… 보고 있지? 눈이 와.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겨울날처럼, 또다시 눈이 내려." 서하는 목이 메어왔지만, 애써 담담하게 속삭였다.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내가 다 기억할게. 우리의 약속, 우리가 함께 꿈꿨던 모든 것들을.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다시 돌아와 줘. 나에게로… 우리의 약속이 있는 이곳으로…"

그녀의 눈물이 지혁의 차가운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병실 안에는 그녀의 울음소리와, 창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꽃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혁의 손가락 끝이 아주 미세하게, 서하의 손가락을 움켜쥐는 듯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얼어붙은 심장 속에 박힌 작은 얼음 조각이, 그녀의 눈물과 함께 아주 느리게 녹아내리는 소리 같았다. 서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희망이, 꺼져가던 그녀의 심장에 다시 불을 지피는 듯했다.

창밖에서는 이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꽃 속에서, 서하의 간절한 약속은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