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비
천 년 제국, 에테르나의 그림자가 가장 깊게 드리워진 곳. ‘바닥골’이라 불리는 빈민가에 오늘도 핏빛 같은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 잊힌 신들의 분노처럼 붉은 기운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 빛은 부유한 상층 도시의 첨탑에 닿아 번들거렸고, 이곳 바닥골의 썩어가는 나무 판자 위에서는 피 흘리는 상처처럼 얼룩졌다.
강림은 낡은 오두막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끈적하고 습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며칠째 계속된 이상한 비는 멈췄지만, 공기 중에는 흙과 썩은 피 비린내가 섞인 듯한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골목 저편에서는 굶주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 소리는 어미의 지친 한숨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혹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체념처럼.
“강림아, 이리 와 앉아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고 야윈 몸으로 불씨 하나 없는 화덕 앞에 앉아 계신 할머니의 손은 갈라지고 거칠었다. 한때는 바닥골 최고의 약초꾼이었지만, 이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강림은 말없이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할머니는 강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마른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마저 슬픔으로 물든 듯했다.
“요즘… 기운이 심상치 않구나.” 할머니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층 도시의 어둠이 여기까지 내려오는 게 느껴져. 심장이 차가워지는 기운이…”
강림은 할머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의 눈은 흙투성이 골목 입구를 향해 있었다. 저 멀리, 제국 병사들의 철갑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순찰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는 늘 폭력과 공포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음산하고 낯선 박자가 섞여 있었다. 마치 차갑게 식은 심장이 고동치는 것 같았다.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깃발이 그려진 칙칙한 갑옷, 허리춤에 찬 긴 칼. 그리고 그들 앞에는 늘씬하고 검은색 옷을 입은 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제국의 ‘심판관’이라 불리는 자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단순한 병사들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그들을 ‘어둠의 사제’라 속삭였다. 에테르나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군대의 힘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어둠의 주술, 피로 얼룩진 계약으로 유지되는 이형의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둠의 사제는 얼굴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 천 사이로 드러나는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차갑고 공허한 시선이었다. 그는 멈춰 서서 바닥골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멎었다.
“에테르나 제국의 이름으로 명한다.” 사제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오늘 밤, ‘정화 의식’에 필요한 ‘선별’이 있을 것이다. 제국에 불순한 기운을 퍼트리는 자들을 걸러내고, 그림자의 광산을 채울 자들을 택할 것이다.”
선별. 그 단어가 바닥골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끌려가 죽거나,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존재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림자의 광산. 한 번 들어가면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곳. 그곳에서 무엇을 캐는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한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곳에서 돌아온 자들은 혼이 빠진 껍데기뿐이라는 소문만이 그림자처럼 떠돌았다.
“어르신들, 노약자들은 먼저 물러나시오.” 어둠의 사제가 손짓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듯했다. “힘 있고 젊은 자들만이 제국에 기여할 자격이 있다.”
병사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골목을 휘저었다.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왔다. 강림은 할머니를 벽 쪽으로 밀쳤다. 그때, 앳된 얼굴의 소년 하나가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소년의 어머니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만, 병사의 몽둥이에 맞아 고꾸라졌다.
“제발, 제 아들은 안 돼요! 아직 열 살도 안 됐어요!” 여인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바닥골에 메아리쳤다.
어둠의 사제가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소란을 피우는구나. 제국의 평화를 해치는 불순한 자여.”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공중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광경에 바닥골 사람들은 모두 입을 틀어막았다. 강림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의 눈앞에서, 숨 쉬던 생명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소년은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병사들에게 순순히 끌려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절망이 가득했다.
강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야만적인 폭력. 이 숨 막히는 압제.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들끓었다.
그날 밤, 바닥골은 피 냄새와 비린내로 가득했다. 어둠의 사제가 끌고 간 사람들은 스무 명이 넘었다. 대부분이 젊은 남자들과 아이들이었다. 강림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곁을 지켰다. 할머니는 강림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강림아… 잊지 마라.” 할머니의 목소리는 파리처럼 가늘었다. “제국은 영원하지 않다. 아무리 거대한 그림자라도, 작은 불씨 하나로 타오를 수 있는 법이니…”
그 말이 강림의 귓가에 박혔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꽃을 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분노의 불꽃이었다.
다음 날 새벽, 강림은 낡은 식칼 하나를 허리춤에 차고 바닥골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골목 끝에 낡은 대장간이 보였다. 김영감의 대장간이었다. 김영감은 한때 제국군에서 일했던 무기장이었다. 그는 제국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끼고 바닥골로 숨어들었지만, 그의 마음속 분노는 여전히 뜨거웠다.
강림이 문을 두드리자, 김영감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저입니다, 영감님. 강림입니다.”
잠시 후,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김영감은 날카로운 눈으로 강림을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밤새 잠 못 이룬 흔적이 역력했다.
“밤새 그 꼴을 보고도 잠이 오더냐?” 김영감은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요, 영감님.” 강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더 이상 잠들 수 없습니다.”
김영감은 강림을 안으로 들였다. 대장간 안은 차가운 쇠 냄새로 가득했다. 벽에는 낡은 연장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투박하게 만들어진 칼날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어젯밤 그놈들이 내 아들까지 끌고 갔어.” 김영감은 한숨을 쉬었다. “그 빌어먹을 그림자의 광산으로… 내 평생 제국에 충성했던 것을 후회한다.”
“영감님.” 강림이 김영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불씨 하나로도 타오를 수 있다고. 영감님께서는… 그 불씨를 지필 방법을 아십니까?”
김영감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체념, 분노, 그리고 희망. 그는 강림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다. 그 빌어먹을 제국의 심장을 꿰뚫을 불씨 말이다. 하지만… 그 길은 피와 죽음으로 점철될 것이다. 너는… 준비가 되었느냐?”
강림은 말없이 허리춤의 식칼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 묻어 있던 여인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듯 느껴졌다.
“준비되었습니다, 영감님.”
김영감은 고개를 돌려 대장간 안쪽의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낡은 천으로 덮인 무엇인가가 놓여 있었다.
“이곳 바닥골뿐만이 아니다. 제국 곳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하지만 다들 두려움에 몸을 떨 뿐이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저들의 어둠이 아무리 깊다 한들, 우리가 서로의 불씨가 되어준다면….”
김영감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었다.
“이 검은 제국 아래, 숨죽여 기다리던 다른 불씨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분노를, 저들의 심장을 태울 거대한 불길로 만들어야 한다.”
강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절망이 아닌, 굳건한 결의와 뜨거운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바닥골에 드리워진 핏빛 노을은 이제 막 시작될 반란의 핏빛 전조처럼 느껴졌다.
